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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Sep 22. 2020

설득

제인 오스틴,  원영선・ 전신화 옮김, 문학동네



‘서머싯셔 캘린치 홀의 월터 엘리엇 경이 재미 삼아 읽는 책은 준남작 명부뿐이었다.’


소설의 첫 문장은 매우 중요하다. 많은 작가들이 첫 문장에 공을 들인다. 독자는 첫 문장을 읽고 책을 덮을 수도 끝까지 읽을 수도 있기에.

이 한 문장에 제인 오스틴은 소설 속 시대의 분위기, 배경과 가족, 아버지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를 모두 담았다.


용모와 지위에 대한 허영심, 그것이야 말로 터 엘리엇 경의 인물됨을 말해주는 전부였다. 덕분에 그는 나무랄 데 없이 과분하고 고결한 성품을 지닌 아내를 맞이할 수 있었다. 십칠 년 동안 아내는 남편이 진정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애썼다. 하늘의 부름을 받아 그녀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에겐 분별력 있고 믿을 만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레이디 러셀은 친구가 세상을 떠난 이 가족의 이웃이자 친구로 살았다. 그녀는 바른 원칙과 가르침을 세 딸이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한 친구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

 

맏딸인 엘리자베스는 열여섯 나이에 어머니가 가졌던 권한과 지위를 모두 물려받았다. 미인인 데다 아버지를 많이 닮은 그녀는 그 영향력이 늘 대단했고, 아버지와 사이도 좋았다. 반명 두 딸은 찬밥 신세였다. 메리는 찰스 머스그로브 부인이 된 덕에 겉으로나마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앤은 아버지에게도 언니에게도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앤은 기품 있고 온화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 레이디 러셀에게는 단연코 앤이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한 대녀이자 아끼는 친구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앤은 아주 예쁜 아가씨였다. 하지만 활짝 폈던 그녀의 젊음은 일찍 사그라지고 말았다.


스물일곱 이란 나이를 당시에 이렇게 봤다는 게 격세지감이 들지만, 우리 세대가 결혼하던 1980년대 초반에도 그 나이를 결혼이 늦은 나이로 여겼다. 40년이 지난 지금은 삼십 대를 넘긴 신부들이 태반이다.


1800년대 딸들은 부모의 작위를 상속받을 수 없었다. 단지 남편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향사 윌리엄 월터 엘리엇이 이 집안의 차기 상속인이었기에 엘리자베스는 그와 결혼하기로 작정을 했다. 남동생이 생기지 않을 경우, 그가 미래의 준남작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였다. 그는 이 집안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고, 얼마 후 낮은 신분의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해 경제적인 독립을 얻었다. 그들 사이의 친분은 끝이 났고, 엘리자베스는 지금 스물아홉이 되었다.  




오 년 전, 친구 J는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딸이 셋이고 아들이 하나였는데 형제간 우애도 좋았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유별스레 좋았다. 재산 정리를 미처 하기 전이라 상속세를 많이 물어야 했다.


병원에 계실 때 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얼마간 유산을 물려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유언으로 생각한 자식들은 아버지 사후 친손자 두 명에게 각각 오천 만원을 줬다. 반면에 세 딸에게서 태어난 외손자 여섯 명은 아무런 유산도 받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손자란 친 손자뿐이었고, 당시엔 딸들도 그걸 당연하게 여겨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얼마 전 J가 아버지에게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며 말을 꺼냈다.


-외손자 여섯 명에게 오천만 원씩 삼억 원을 나눠 줬더라면 우리는 그만큼 상속세를 덜 물었을 것이고, 아이들은 평생 외할아버지를 기억하지 않았을까.

맏언니의 경우에는 친가가 없어서 아이들에게 유일한 할아버지였는데.

아버지는 친손자만 생각했고, 우리는 그걸 당연히 여겨서 아무도 아버지에게 외손자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어. 만일 누군가 이야기했더라면 아버지도 우리 아이들을 떠올렸을 텐데. 


지금에야 상속 지분이 딸이든 아들이든 동등해 도장 찍어주지 않으면 재산 분할이 안 되는 세상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바뀐 법에 관습이 따라오지 못했다. 부모는 결혼한 딸을 남의 집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많은 딸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지 못했다. 침묵과 순응이 미덕이었다.




웬트워스 대령과 앤은 사랑하는 사이였다. 대령은 뛰어난 용모를 가졌지만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앤은 그와 결혼할 수 없었다.

대령은 전쟁에 나가 혁혁한 공을 세워 많은 재산을 갖게 되었고, 팔 년 만에 앤 앞에 나타났다. 그는 앤을 오해하고 있었다. 남의 말에 설득되어 자신을 버린 여자로.


앤은 그를 이해했다.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면서도 냉담하게 대할 수도 없었으리라. 지난 일로 그녀를 탓하고 부당할 만큼 크게 분개하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안중에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갖게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날 가졌던 감정의 편린이었고, 대놓고 인정하진 못하는 순수한 우정이었으며, 그가 지닌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의 증거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의 마음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자신이 기쁜 건지 고통스러운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앤은 창가에서 패니의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여동생의 약혼자가 결혼하는 게 섭섭했다. 자기 여동생이라면 절대로 약혼자를 잊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 앤은 먼저 동의한다.


-불쌍한 패니! 그 애라면 이렇게 빨리 그를 잊지 않을 텐데.
-그래요. 당연히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믿어요.

앤은 낮고 다감한 목소리로 상대의 주장을 수긍한다.

소통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다. 소통이 되어야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걸 유보하면 상대는 감성적이 되어 마음을 열게 된다.

-우리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그렇게 금방 잊어버리지 못한답니다. 아마도 그건 우리의 장점이라기보다는 운명일 테지만요.


하지만 앤은 약혼자의 변화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온 거라며 그를 변호한다. 패니의 오빠는 그건 남자의 본성이 아니라며 남자의 신체가 강건하듯이 감정도 강하니 그만큼 잘 견딜 수 있다고 반박한다.

 앤은 남자나 여자나 감정은 같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설전을 벌인다.


-남자의 감정이 더 강할지도 모르죠. … 하지만 그렇다고 더 오래 살지는 않잖아요. 당신들은 힘들고 궁핍하고 온갖 위험한 상황도 감당해야 하고 항상 열심히 일하느라 고생하고 온갖 위험과 고난에 노출된 삶을 사니까요. 이 모든 것에 여자 같은 감정까지 더해지면 정말 너무 힘들 거예요.


펜이 떨어지는 소리에 앤은 웬트워스 대령이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걸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설마 듣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옆 테이블에서 편지를 쓰고 있던 웬트워스 대령은 앤이 패니의 오빠를 설득하는 말을 듣고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깨닫고 오해를 풀게 된다.


작가는 앤의 입을 빌어 자기의 생각을 말한다.

높은 수준의 교육도 글을 쓰는 것도 남자의 전유물이었다. 여자는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신중한 결혼을 해야 했고, 거기에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은 금물이었다.

팔 년 전 레이디 러셀은 웬트워스를 포기하도록 앤을 설득했고, 어려서부터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강요받은 앤은 이를 따라야만 했다. 나이가 들어 웬트워스를 다시 만난 앤은 신중함과 로맨스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로 인해 큰 고통을 겪긴 했지만 저는 제가 한 일이 옳았다고 믿을 수밖에 없어요. … 제 친구의 충고에 따랐던 것이 전적으로 옳았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그분의 충고가 옳았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건 아마도 결과에 따라 좋은 충고였는지 나쁜 충고였는지 가려지는 그런 경우였던 것 같아요. 물론 저러면 어떤 비슷한 상황에서도 그런 충고는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하려는 말은 그분의 말을 따른 것이 옳았다는 거지요. 그러지 않았다면 약혼을 유지했겠지만 당신을 포기한 것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을 거예요.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테니까요. … 강한 의무감은 여성이 물려받을만한 괜찮은 자질이니까요.



『설득』은 제인 오스틴이 쓴 마지막 소설이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814년은 나폴레옹의 전쟁이 일단락되고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 해군이 귀향한 시기였다. 신흥 계급이 부상하고 사회 경제적인 변화가 잇따르지만 결혼 시장의 경제 논리는 일관되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이백 년이 지났고, 시대는 많이 달라졌다. 귀족은 사라졌고, 이제는 결혼을 반대하는 대모의 말에 설득되는 대녀도 없다. 하지만 오래된 관습에 의해 은연중 심어진 남녀 간의 차별은 아직 존재한다. 자연스레 스며들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오 년 전 J가 이걸 깨달았더라면, 용기를 내어 아버지를 설득했을 것 같다. 아버지에게도 좋은 일이었고, 외손자들도 평생 할아버지의 선물을 기억했을 텐데.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심리 묘사가 극히 섬세하다. 여주인공의 감정이 기대와 실망으로 오르내리는 장면은 작가가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세밀하다.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표정도 허투루 쓰인 게 없다. 인물의 행동으로 성격과 가치관을 드러낸다.


소설은 일단 재미있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읽다가 잠시 쉬려고 책을 덮었는데, 다른 일을 하는 내내 마음이 책에 가 있었다. 이어질 다음 장면이 궁금했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 소설도 해피앤딩으로 끝마친다. 최근 인구에 회자되거나 큰 상을 타는 현대 소설들은 행복한 결말이 드물다. 세상이 복잡해져서 그런지 모르지만 어떤 찜찜함, 여운을 남기기에 독자는 그 소설을 잊지 못하고 기억하게 된다.

그런 책들은 멘틀이 튼튼하지 못할 때 읽으면 한없이 불편하다. 제인 오스틴 소설은 절대 그럴 리 없다. 가라앉은 기분을 단숨에 끌어올려 준다. 제인 오스틴 마니아가 많은 이유 아닐까.



#『설득』제인 오스틴, 원영선・전신화 옮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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