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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Sep 23. 2020

아날로그의 반격

데이비드 색스 지음, 박상현・이승연 옮김, 어크로스



2012년 작가는 집 근처에 새로 문을 연 레코드 가게에서 플랭클린의 앨범을 사서 턴테이블로 음악을 들었다.


온 세상의 음악을 클릭 한 번이면 들을 수 있지만, 그는 늘 ‘이것보다 더 좋은 노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계속 노래를 찾기만 했다. 뭔가 중요한 게 빠져 있었다. 이후 그는 기회가 되면 음반을 샀다. 음악을 손으로 고르고 구매하는 ‘육체적인’ 즐거움에 빠져 들었다. 그 음반에 담긴 곡들을 전부 공짜로 내려받아 다섯 가지 기기에서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정말로 비합리적인 짓을 하고 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하지만 몇 달에 한 번꼴로 음반 가게는 계속 늘어났으니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는 건 작가만이 아니었다. 사람들 생각에 음반 가게는 이미 10년 전에 멸종했어야 하는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유통업을 상징했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음반을 사는 이들이 20대와 10대라는 것이다. 게다가 더 놀랄 만한 소비자 집단은 여자애들이었다. 여자들이 레코드판을 산다는 것은 음반 매장이 문화의 지평에서 제 위치를 찾아가는 신호였다.




이사를 서너 번 할 때 나는 전축의 테이블을 버리지 않고 끌고 다녔다. 오래전에 산 레코드판과 함께.

자주 지는 않지만 눈 오는 날이나 비 오는 날 같은 특별한 날엔 한 번씩 레코드 판 위에 턴 테이블의 바늘을 올렸다. 창가에 앉아 눈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으면 나는 과거의 어느 시간이든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가치에 대한 인식이 아날로그의 약점을 강점으로 부각했다. 디지털에 둘러싸인 사람들은 좀 더 촉각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경험을 갈망하게 됐다. 아날로그가 디지털에 비해 훨씬 번거롭고 값비싼데도 불구하고. 아날로그 경험은 디지털이 주지 못하는 즐거움과 만족감을 주고 때로는 더 나은 결과물을 낳기도 한다.


컴퓨터 자판으로 대부분 글을 쓰지만 하루에 한 번은 노트에 글씨를 쓰고 싶다. 손에 잡히는 물성의 느낌과 몸과 심리 상태에 따라 조금씩 다른 글씨체로 채워진 노트를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볼펜도 싫다여직 연필로 글쓰기를 고수하는 친구도 있다. 김훈 작가도 그렇다고 들었다.


작가는 이 책에 실린 많은 이들이 러다이트(Luddite, 신기술 반대자)가 아니라는 걸 강조한다. 그들은 디지털 세상을 몰아내기보다 아날로그 세상을 더욱 가까이 끌어당겨 그 장점을 활용해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스티븐 킹이 말했다.

“모든 오래된 것이 머지않아 새로운 것으로 탄생할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선택은 디지털이냐 아날로그냐가 아니다. 그런 단순한 이분법은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도 모르게 사용하고 있는 언어일 뿐이다. … 현실은 다양한 색상과 수많은 질감과 켜켜이 쌓인 감정들로 이루어진다. 현실에서는 이상한 냄새도 나고 희한한 맛도 난다. 인간의 불완전함은 흠도 되지 않는다. 최고의 아이디어는 그런 복잡함에서 나오지만 디지털 기술은 그 복잡함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종이 노트는 전원도, 부팅 시간도, 동기화도 필요 없다.  


혁신을 이끌어내는 것은 상상력인데 상상력은 표준화되는 순간 시들어 버린다. 표준화는 디지털 기술이 요구하는 바로 그것, 즉 소프트웨어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모든 것을 1과 0으로 부호화하는 것이다. 몰스킨 노트는 개인의 기분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표준화되면 그 모든 것을 놓치게 되죠.” 세브레곤디가 말했다.


인지 심리학자인 대니얼 레비틴은 정보 과부하가 극심한 피로, 대마초 흡연보다 뇌 건강에 더 해롭다고 경고한다. 종이의 장점은 써 내려가는 동안 집중하고 기억하기 쉬워서 정신 건강에 좋다는 것이다. 또한 불에 타지 않으면 종이는 일 만년이 지나도 읽을 수 있다.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을 날린 경험은 누구나 한두 번 있으리라.


예전에 1997년부터 2012년까지의 어떤 자료들을 모아 책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특이하게 2003년 무렵 디지털카메라가 널리 보급된 이후의 사진 자료들이 모두 사라져 찾느라 무척 애를 쓴 적이 있었다. 그 이전 자료는 인화된 사진으로 모두 남아 있었다. 필름 카메라로 찍고 더디게 인화한 사진이 저장성이란 면에선 사용하기 편리한 디지털카메라보다 나았다.


아이들 사진을 많이 찍어 핸드폰과 컴퓨터에 보관하지만 그런 사진들은 잃어버릴 확률이 매우 높다.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면서 사라지기도 하고, 어디에 저장해 놓았는지 모르기도 한다. 그러니 번거롭더라도 기념해야 할 사진들은 인화해 놓으라고 충고하고 싶다. 앨범을 만들어 놓으면 더욱 좋다.


노랗게 퇴색한 앨범의 사진을 함께 보는 것과 컴퓨터에 저장된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 둘 중 어느 게 더 추억을 소환해 이야기하기 좋을까.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종이로 인쇄된 자기의 책을 갖기를 소망한다. 이전에 책을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게 인쇄물인데 굳이 책을 왜 만들려 하느냐고 내게 묻는 사람이 있었다.


왜 책인가? 왜 인쇄물인가?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인쇄되면 나는 책을 손으로 만져보고, 표지에 적힌 내 이름을 보면서 나의 모든 노력이 가치 있었음을 확인할 것이다. 그것은 판매부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지난번에 손자들이 잠깐 집에 와 있을 때 읽어 줄 책을 사러 동네 서점에 간 적이 있었다. 아이들 연령에 적합한 그림책을 눈으로 보지 않고 온라인으로 살 순 없었다. 서점은 예나 다름없이 그대로 있었다. 아이들이 중고등학교 다닐 무렵엔 참고서를 사느라 많이 들락거렸는데, 이후엔 그곳에 간 적이 없다. 대부분 온라인으로 책을 다.

십 년이 지났을 텐데 주인은 나를 알아봤다. 손자들 읽을 책을 사러 왔다 했더니, 주인이 많이 웃었다. 그는 별로 늙지 않았다. 늘 책을 끼고 살아서 그런가, 학생들을 상대해서 그런가 추측했다. 그림책 코너에 앉아서 나는 이런저런 책들을 꺼내 읽었다. 이제 겨우 글자를 조금 아는 상태이니, 글이 많기보다는 흥미로운 그림이 있는 책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직접 보고 고르니 책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면 뜻하지 않는 책을 빌리는 경우가 간혹 있다.

요즘은 도서관 앱이 있어서 미리 책을 검색할 수 있다. 청구기호까지 알고 가면 책 찾는 시간이 절약된다. 삼십 분이면 열 권이든 스무 권이든 찾아서 빌릴 수 있다. 굳이 도서관 열람실의 공기를 맡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나는 이따금 오전이나 오후 반나절을 느긋하게 도서관에서 보낸다. 그 시간이 무척 행복하다. 여유 있게 서가를 훑노라면 생각지 않은, 어디선가 제목을 들은 적 있는 책이 눈에 띈다. 반납 코너에서 몇 번이나 빌리려다 청구기호가 건너뛰고 넘어가 포기한 책을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이 책 『아날로그의 반격』도 그렇게 빌렸다. 그때의 심쿵한 기분이란.

그런 게 아날로그의 매력인 것 같다.



 #『아날로그의 반격』데이비드 색스 지음, 박상현・이승연 옮김,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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