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인 Sep 24. 2020

이 난리통에도 저리 시뻘겋게 익었제

우리 아이들은 버틸 수 있을까



토요일이면 우체국 앞에 사과 트럭이 와 있다. ‘안동사과’라 적힌 빛바랜 플래카드 아래에 검은 눈이 빼꼼한 아주머니가 한 명 앉아 있는데 그녀 이름은 ‘동백 아가씨’로 유명한 여가수와 이름이 같다. 일주일에 한 번 그 길을 지나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그녀는 남편과 같이 일하는데, 스쳐 지나가도 우리는 아저씨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 아파트에 오래 산 이들은 대부분 그녀를 안다. 그녀는 '우체국 앞 사과 아줌마'로 우리 아파트의 트레이드마크다.


사람들은 대체로 사과를 만 원어치 산다. 그녀는 사과를 하나하나 신중하게 들여다보고 봉지에 담아준다. 사과를 안 사고 지나가도 그녀는 얼굴 마주치면 꼭 인사를 한다. 


작년 여름 한동안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이제 사과 장사를 그만뒀는지 궁금해했다. 사과를 사러 나왔다가 헛걸음하고 우체국 앞을 서성이던 낯선 사람들은 그녀의 부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2 주 후에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나타났다. 모처럼 아이들과 외국 여행을 다녀왔다 했다. 아줌마도 아이들이 있고, 가끔 휴가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큰 비와 오랜 장마로 과일 값이 금값이 되었다. 사과를 만 원어치 살 수 있을까? 트럭 위의 사과는 유난히 빨갰다. 아주머니는 군말 없이 봉지에 사과를 담아줬다.


-사과가 빨갛게 잘 익었네요.

-그러게요. 이 난리통에도 저리 시뻘겋게 익었제.

바이러스에, 장마에, 사람들에겐 난리였던 한 해였건만 사과는 붉게 익어 추석 차례상에 올라갈 차비를 하고 있었다.

 

페이스북 친구인 한 농부 아저씨는 큰 호박 때문에 시름에 잠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커서 좋은 게 아니라 징그럽고 불안해요. 기후 변화 탓인지, GMO 탓인지.


내가 보기에도 호박은 쌀 한 포대보다 훨씬 컸다. 한 40 킬로그램 정도는 나갈 것 같았다. 그는 10년 넘게 호박을 심었는데 이리 큰 호박은 처음 봤다 했다. 농부는 호박을 혼자 들지 못해 아내랑 둘이서 끙끙 거리며 옮겼다. 그리곤 고민한다. 이 호박을 어찌 하나. 며칠 전 친구 카톡 프로필에서도 나는 제법 큰 호박 사진을 봤다. 시골에 놀러 갔다가 호박을 선물 받았다며 친구는 호박을 끌어안고 사진을 찍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지역의 강에 유난히 큰 메기가 헤엄치고 다니고, 농사꾼들이 수확해온 농작물을 군인이 압수하는데, 모두 최상품이었다는 글을 나는 불길하게 떠올렸다.




지난주에 대구에서 20대를 함께 보낸 친구 다섯을 만났다. 우린 모두 59년생 돼지띠다. 친구 아들 결혼식이라 모처럼 만났는데, 차를 마시며 다들 우리만큼 변화를 많이 겪은 세대는 없을 거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간 평탄한 삶을 산 친구도, 견디기 힘든 일을 겪은 친구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시기를 비교적 잘 넘겼다.

전쟁을 겪지 않은 운 좋은 세대이지만, 정치적 변화와 세대 간 갈등을 겪었다. 달라진 남녀 간 성 역할과 급격히 바뀐 가치관으로 혼돈스럽다. 그러니 우리는 일종의 낀 세대다. 어설피 의견을 내놓는니 입 다물고 있는게 낫다는 말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어느 시기가 가장 좋았을까? 

1970년, 2000년, 2010년. ‘지금’이라고 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주위를 둘러보면 어쩐지 사방에서 경계경보가 울리는 것 같다. 세상은 서서히 변하다가 점차 가파르게 발전했다. 전보다 살기는 좋아졌는데 이제 그만큼의 후유증이 보이기 시작한다.



브라질 북부 파라 주의 아마존 열대우림에서 발생한 산불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


지구 곳곳에서 불이 다. 지구의 온도가 올라서 그렇다 한다.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에서, 겨울이면 영하 50도까지 내려갔던 시베리아에서. 그린란드와 남극의 빙하가 녹고 있다.

얼음이 녹으면 매머드뿐 아니라 3만 년 전 고대의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도 깨어날지 모른다는 소식을 들으니 섬뜩하다. 코로나 19만이 아닐 수도 있겠다. 지금에야 생각하니 미세먼지는 일종의 약한 경고였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 사과는 윗부분은 붉고 아랫부분은 파랬다. 요즘 사과는 아래위를 돌려봐도 모두 붉다. 그러니 맛이 훨씬 좋다. 사과가 예전처럼 붉고 푸르지 않은 건 다 이유가 있다.

과수원엘 간 적이 있는데, 어릴 적 본 나무와 너무 달랐다. 사과나무는 예전처럼 키가 크지 않고 어른 키보다 조금 큰 정도여서 누구나 쉽게 사과를 딸 수 있었다. 품종을 개량했는지 모른다. 아니, 예전엔 어려서 사과나무가 커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과수원 풀밭에는 햇빛을 반사하게 사방에 은박지가 깔려 있었다. 그러니 사과는 어느 구석 푸를 여지가 없었다. 

작은 나무 하나에 달린 사과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열매의 무게로 가지는 부러질 것처럼 아래로 쳐졌다. 저렇게 열매를 매달고 다음 해 나무는 살 수 있을까? 아마 나무는 겨우내 엄청난 비료로 몸의 기운을 회복할 것 같았다. 나는 나무가 불쌍했다. 차츰 남쪽 지방에서 사과나무를 볼 수 없을 거란 말도 들린다. 사과나무는 점점 북쪽으로 올라갈 운명이다. 너무 큰 호박을 보는 농부의 불편한 마음을 나는 알 것 같았다. 주렁주렁 가지가 부러질 듯 열매를 매단 사과나무를 바라보던 내 마음이 그랬으니까.


많은 환경 운동가들이 초조하고 불안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지구 환경의 위기가 극에 달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달리기를 멈춰야 할 순간을 이미 놓쳐버렸는지 모른다. 편리함, 안락함, 보다 나은 것을 바라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으니…. 


우리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지구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을까?

나무도 풀도 맑은 공기도 사라진 지구에서 우리 아이들은 버틸 수 있을까?


-작은 사과도 괜찮아요? 먹기엔 괜찮은데. 흠 있는 사과도 드실래요?

이따금 안동 사과 아줌마는 이렇게 묻고 봉지에 작고 상처난 사과를 몇 개 얻어준다. 


조금 아쉽고, 조금 불편한 쪽으로 방향을 돌려 걸어가는 게 지구를 살릴지 모른다. 아니, 인간을. 




작가의 이전글 아날로그의 반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