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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Sep 28. 2020

그런 날이 있다

엎친 데 덮친 날



세금 고지서인가?


토요일 오전, 우편함에 꽂힌 종이를 펼쳐봤더니 속도위반 범칙금 지였다.


이게 대체 언제야. 날짜를 확인했더니 지난주 금요일 옆 동네 모임에 다녀오던 길이다. 집 부근에서 찍혔다. 50킬로 제한구역에서 나는 62킬로로 달렸다. 한 달 만에 차 몰고 나가서 범칙금까지 물게 되다니. 3만 원이면 살 수 있는 게 뭐 있더라? 스스슥 여러 가지가 눈앞에 스쳐갔다. 너무하다. 50킬로라니. 도대체 언제부터 바뀐 거야. 투덜투덜.


그날 어쩐지 옆동네 마트 근처 도로는 온통 30으로 적혀 있었다. 놀라서 얼른 브레이크를 밟았던 기억이 났다. 차에 네비가 없어서 속도에 둔감하다. 차도 낡았지만, 네비는 더 낡아 자꾸 떨어지길래 오래전에 아예 버렸다. 모르는 길은 잘 안 가고, 혹시 가게 되면 전날 꼼꼼하게 집에서 길과 거리를 확인한다. 차에 핸드폰 걸이가 없어서 핸드폰 네비도 잘 보지 않는다.


운전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겁이 많아서 차를 몰 때 시속 60킬로 이상 속도 내는 법이 거의 없다. 운전대를 잡으면 늘 여러 가지 안 좋은 상상을 하는 바람에 꼭 성호경을 긋고 출발한다. 그런데.


범칙금 딱지는 처음 받아보는 것 같다. 주차위반 딱지는 그간 몇 번 받았지만. 나는 얼른 돈을 입금하고 용지를 버렸다. 나라 재정도 어렵다는데 세금 기부한 걸로 치자,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억지로.


그러고 나서 이른 점심을 준비하기로 했다. 미리 해놓고 쉬고 싶었다. 파스타를 만들기로 했다. 눈이 나쁜데 집에선 안경을 거의 쓰지 않는다. 양념 칸 뒤에 들어 있는 올리브유 병을 꺼내려다 앞에 놓인 참기름 병을 못 봤다. 추석에 쓰려고 사놓은, 뚜껑도 열지 않은 기름병이 퍽석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기름이 쏟아지고 고소한 냄새가 번지는데, 한 방울도 건질 수 없었다. 다행히 푸실리를 금방 끓는 물에 넣었으니, 익는 8분 간 쏟아진 기름을 처리해야 했다. 아까워할 겨를도 없이.


튀어나간 유리 조각을 줍고, 을 버리고, 키친타월로 기름을 적셔 닦고, 주방 세제 묻혀서 문지르고, 물 적신 걸레로 마무리했다. 그 사이 푸실리가 익었다. 그런데 기름이란 게 그리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대략 닦아냈지만 디디는 발에 느낌이 남아 있었다. 얼른 양말을 신고 파스타를 마무리했다.


한숨 돌리느라 소파에 앉아서 햇살 비치는 거실을 바라보니, 내가 참 많이 왔다 갔다 했구나 알 수 있었다. 온통 거실에 기름 묻은 내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물걸레 밀대로 온 집을 닦았다. 그래도 기름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베란다 구석에 둔 베이킹 소다가 떠올랐다. 그래 그거야, 확실하게 지워줄 거야. 한 숟갈? 아니, 듬뿍 넣어야지. 베이킹 소다 푼 물에 걸레를 적셔 대강 짜서 거실을 닦았다.


어, 어, 좀 미끄럽네. 남편 들어오다가 꽈당 넘어지겠는 걸. 한 소리 듣기 전에 얼른 닦고 말려야지.


마른 거실은 희뿌였게 보였다. 베이킹 소다를 너무 썼는지 모른다. 나는 걸레를 깨끗이 빨아서 이번엔 꼭 짜서 온 집을 닦았다. 두 번이나. 걸레 헹군 물을 보니 거실 바닥의 묵은 때를 다 벗긴 걸 알 수 있었다.


추리소설의 아이템도 떠올랐다.

이렇게 남편 오기 5분 전에 거실 바닥에 베이킹소다를 칠해 놓는 거야. 남편은 들어오다 넘어지겠지. 뭐, 완전 범죄 구만.


저녁에 남편은 기름 쏟은 곳이 싱크대 앞이냐고 물었다.


-거기 아닌데.

기름은 끈질겼다.


그렇게 엉기는 날이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엎친데 덮친 날.


밤에 생각하니, 자동차 견인해 가서 6만 원 내고 찾아온 날에 비하면 다행이었다. 게다가 면이 좀 긴 했지만 파스타 맛도 괜찮았고, 차에 핸드폰 걸이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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