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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Oct 13. 2020

어제와 다른 오늘

어머니를 보내며


 지난 사흘 어머니 장례를 치렀다.


전날 오후 엄마가 위독하다는 문자를 받았을 나는 갓 결혼한 새댁 집을 방문해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나는 새댁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집에 돌아가 동생과 전화를 하고 싶었다.


-며칠 버틸지 모르겠어.

동생 말을 들으며 나는 벽에 걸린 달력을 쳐다봤다. 다음날부터 연휴가 사흘간 이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다음 주 중반 정도에 큰일을 치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상태를 알리는 카톡방의 문자는 형제들의 질문과 동생의 대답으로 줄줄이 이어져 차츰 장례에 대한 의논으로 바뀌어갔다. 다섯 형제여서 형편도 생각도 제각기 달랐다.


장례식장을 어디로 할 것인가. 식장은 큰 걸로 할 것인가, 작은 걸로 할 것인가. 선산에 묻을 것인가, 국립묘지에 묻을 것인가. 고별식을 할 것인가, 장례 미사를 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서 잠을 잘 것인가. 그러다 동생의 말에 다들 문자를 멈췄다.


-엄마 아직 살아계신다.

우리는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알리자는 댓글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저마다 분주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해 넘어가는 시각이 되자, 맑은 날씨임에도 어딘지 비 오기 전 같은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불안해서 방과 거실을 서성이다 급히 집을 나섰다.

그간 코로나 때문에 몸조심하느라 두 달간 성당을 가지 않았다. 저녁 7시 30분, 나는 엄마의 선종을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했다. 고통을 덜어주시기를, 엄마가 잠자듯 돌아가시기를 기도했다.


스산하고 울한 이상한 밤이었다. 지나고 보니 엄마는 그 시간 죽음과 사투를 벌였다. 뒤척이다 2 시경 잠을 이뤘는데, 아침에 문자를 보니, 엄마는 새벽 2 시 30분에 운명하셨다.


식장은 제일 큰 걸로 잡았다. 올 사람 없으니 작은 걸로 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이 힘든 시기에 한 두 분만 오셔도 널찍한 공간에서 마음 편히 머물다 가셨으면 싶었다. 슬픔 중에도 조문 온 친구를 만나면 반가워서 웃었고, 이따금 엄마가 생각나면 울컥 목이 메었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회환. 한 사람의 생애를 무엇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입관 예절을 할 때 오랜만에 엄마를 만났다. 그 순간 깨달았다. 엄마가 나를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평생 남동생만 사랑하고 딸인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엄마의 시신을 보는데 전혀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사랑받지 않으면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마스크를 쓴 상태로 뺨에 뽀뽀하고 나오려다 다시 되돌아가 마스크를 내렸다. 입술에 닿는 엄마의 피부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몇 번이나 뽀뽀하고 엄마 귀에 속삭였다.

-엄마, 고마워. 사랑해.


엄마는 요양병원에서 가족 없이 임종을 맞았다. 면회 금지여서 동생도 엄마를 만날 수 없었다. 돌아가신 후였지만,  나는 엄마를 실컷 안아 드려야 했다.


크게 속 썩인 적 없다고, 엄마는 우리 부부를 좋아했다. 나는 엄마에게 해준 게 없었다. 동생이 엄마의 궂은 수발을 다 들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찾아가 안아주면 엄마는 "야가 왜 이라노." 하면서 밀어냈지만 싫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형제들이 다들 큰 올케에게 연락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모두 그녀가 오기를 원했다. 동생은 9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를 챙기게 되면서 올케와 헤어졌다. 올케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었다. 형제들은 한 마음으로 그녀의 건강을 염려했다. 


다음 날, 장례 미사는 엄마가 다니던 당 신부님이 해주겠다고 하셨다. 동생은 염치없다고 머리를 긁었다. 3년 전 동생이 모시고 가는 바람에 엄마는 그간 성당에 다니지 못했다.


-고해성사할 사람이 몇 명 정도 될까요?

신부님이 고해실에 들어가며 물었을 때 나는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동생이 첫 번째로 들어가고 막내와 올케가 뒤를 자 조카들이 모두 줄을 서는 게 아닌가. 여덟 명 정도 고해를 한 것 같다. 나는 맨 마지막에 하려다 접었다.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화해가 일어났기에 평화로웠다.


사흘간 조문객 없는 장례 식장에서 우리 가족은 화기애애하게 지냈다.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 받은 아들이 아버지와 말을 섞었다. 자주 만나지 못한 며느리를 시아버지가 ‘제수씨!’라 부르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제수씨’라니, ‘아가’라 불러야지.

그러고 났더니, ‘아가’란 말이 너무 정겨워 나는 혼자서 조용히 "아가, 아가" 되뇌 되었다.


오래전에 동생은 아버지 재산을 형제들과 의논 없이 팔았다.

-제수씨, 미안합니다. 형편이 어려워서 그리 됐습니다.

동생이 막내 올케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겠지요.


엄마는 끊어진 모든 걸 이어주었다. 형과 동생, 아버지와 아들, 아주버니와 제수, 고모와 조카,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까지. 서로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던 얼음이 사흘간 녹아 눈물이 되어 흘렀다. 엄마는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갔다. 


-엄마가 집에서 돌아가셨더라면.

막내는 엄마가 병원에서 돌아가신 걸 계속 슬퍼했다.

-난, 할 수 없었어. 아마, 너희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형이 오랫동안 모셨으니 이제 됐어. 엄마는 이제 편안해지셨어.

나는 막내를 다독였다.


동생을 사랑하는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 고등학교 동창이었는데, 장례를 마칠 때까지 드문드문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고향이니 그럴 수 있다, 생각하지만 찾아온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니 그들은 생각보다 동생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하나 내세울 것 없는 동생을 위하는 그들을 보며 우정이란 런 거구나, 느낄 수 있었다.


조문객을 맞은 날은 이틀이었다. 그간 다녀간 손님은 총 백오십 명으, 가족을 빼면 하루 삼사십 명 정도였다. 크게 잘 사는 형제는 없어도, 다섯 남매가 결혼해 자식을 둘씩 낳았으니 직계 가족만 스무 명이어서 식장이 허전하지 않았다. 장례는 허식을 줄이고 엄마를 최대한 잘 모시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 진행했다.


직원이 화장 후 나온 분골을 하얀 종이에 담아 각지게 접었다. 90년 삶이 책 한 권 부피 밖에 되지 않았다. 갑작스레 울음이 터져 나왔는데, 돌아보니 조카며느리였다. 동생이 며느리의 등을 툭툭 쳤다.


선산, 아버지 옆에 엄마를 묻었다.


-오늘 밤에 싸우지 마세요.

-산 무너질라.

저마다 한 마디씩 던졌다.




비탈진 산을 내려오면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는 물이 빠져 기슭이 드러나보였다. 그곳에서 옹기종기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구름이 적당히 해를 가려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아, 저기 나비 봐요.

녹두빛 물 위에 꽃잎처럼 작은 노랑나비 두 마리가 엎치락뒤치락 날아오르고 있었다.


-사이좋게 노는구나.

우리의 시선은 모두 한 방향이 되어 머리 위로 팔랑이며 지나가는 나비를 따라갔다.


-둘이 싸우네요.

결혼 안 한 조카가 덧붙여서 나는 슬며시 웃었다.


푸르른 산 중턱에 이른 단풍이 붉은 띠를 둘렀고, 들녘 콩밭은 군데군데 노란 물이 들었다. 누렇 익은 벼이삭이 나지막한 시골집 뒷 지붕까지 차 올라 가을은 넉넉하고 풍요로웠다.


시월은 참 좋은 계절이다. 게다가 한글날이니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다. 우리 엄마는 복도 다.




집에 돌아와 지친 몸을 누이니 생각이 멍하니 사방을 떠돌다 한 곳으로 귀착됐다. 시간이 흐르면 차츰 나아질까? 언젠가는 덤덤하게 엄마를 떠올리게 되겠지.


카톡방에 드문드문 사진과 글이 올라왔다.


사망확인서.

엄마 옷을 모두 버릴 테니 이의 없냐고 묻는 말.

뒤늦게 들어온 부의금 알림.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어제와 오늘이 달랐다.

이젠 엄마가 없다. 엄마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왔다.

‘무슨 차이가 있어. 떨어져 지낸 지 오래잖아. 이전에도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그냥 대구에 살아계신다 여기면 되지.’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세수할 때면 자꾸 눈물이 났다.


-엄마, 꿈에 한번 나와 주세요.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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