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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Oct 07. 2020

동양인이 본 서양의 종교 역사, 『십자군 이야기』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송태욱 옮김, 문학동네



“전쟁은 인간이 여러 난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할 때 떠올리는 아이디어다.”


 십자군 이야기는 동양인이 쓴 서양 역사서이다. 같은 종교를 믿어도 모태에서부터 믿은 사람과 성인이 되어 믿은 사람이 바라보는 종교가 같을 수 없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깊이 스며든 그리스도교를 떨구어내지 못했던 많은 서양 역사학자들과 달리 저자는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배경은 11세기 초반, 장소는 서유럽과 팔레스티나. 2020년 한국에 사는 독자가 읽기에는 한참 동떨어진 이야기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 책을 읽는 걸까? 그들과 우리를 연결해주는 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종교밖에 없어 보이는데.




중세 중기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큰 사건이 세 개 있었는데, ‘카노사의 굴욕(1077년)’과 ‘십자군 전쟁(1095년~1291년)’, ‘아비뇽 유수(1306년)’다.


파문의 위력은, 파문당한 자와 관계를 지속하면 그 사람도 파문당해 그리스도교의 적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중세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었다. 당연히 가신과 병사들은 파문당한 주인을 떠난다. 즉 파문이란 사회로부터 전면적인 추방을 의미했던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반대하는 인사(人事)를 하자, 교황은 자신을 무시한 황제를 바로 파문에 처했다. 1077년 비밀리에 이탈리아로 들어온 황제는 교황이 체재 중인 카노사 성 앞에 섰다.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자답게 얇고 수수한 옷차림으로, 줄기차게 쏟아지는 1월의 눈을 맞으며 사흘 밤낮을 맨발로 서 있었다. 쉰일곱 살의 교황과 스물일곱 살의 황제. 카노사의 굴욕은 서유럽 전역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일깨운 일대 사건이었다.




영국 화가 아서 C 마이클 작품(1913년). /게티이미지코리아

 


하지만 그 후 8년간 황제 하인리히는 교황 그레고리우스를 죽을 때까지 궁지에 몰아넣었다. 교황은 도피처인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에서 죽었다.


당시 교황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 교황의 거처였던 라테라노 궁전에 머물 수 없었다. 교황이 직면한 가장 큰 난제는 신성 로마제국(독일)이 지닌 강대한 힘으로부터 로마 교황의 권위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유럽의 세속 군주들의 힘과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동방을 목표로 삼은 것은 동방으로 향하면 ‘예루살렘 해방’이라는 대의이자 명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십자군을 성공시켜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고 황제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십자군 결성을 호소했다.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의 교황 우르바누스 2세. 1490년대 작품. 위키백과



교황은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에게 면죄를 부여했다. 이전에 어떠한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당시 예루살렘에는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 순례자들이 공존하고 있었기에 이 침공을 이슬람 측은 단순한 영토 분쟁으로 보았다. 종교전쟁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 했다. 십자군이 왜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지 이해하지 못했기에 허를 찔렸다.


1차 십자군은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이후 20년간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 십자군 국가를 확립했다. 이 원정의 주역은 왕이 아닌 유럽 각지의 제후였다.


그들은 때때로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분열을 반복했지만 최종 목표 앞에서는 언제나 단결했다. 그것이 1차 십자군이 성공한 요인이었다.


참가한 제후들은 레몽, 고드프루아와 그의 동생 보두앵, 보에몬드와 그의 조카 탄크레디였다.


여자란 결혼상대를 고를 때는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 있고 신뢰할 수도 없는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도 미워할 수 없는 남자에게 끌리는 법이다. 보에몬드에 대한 설명이다.

 갓 스물이 된 탄크레디는 최고의 전사였다. 그는 서른여섯 살에 죽었는데 이후 젊음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지금도 유럽인들은 탄크레디라는 이름을 들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신의가 두텁고 생기 넘치는 영원한 젊은이를 떠올린다.

예루살렘 왕이 된 보두앵 1세의 최대 장점은 복수나 원한을 깨끗이 잊는다는 점이다. 또한 분노 때문에 흥분하는 일도 라이벌 의식도 없었다. 훌륭한 인격자여서가 아니라 그런 일은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중세에 드물게 내세울 영지도 없었던 제후였다. 하지만 오리엔트에 와서 가장 크게 된 인물이었다.


인간 세계에서는 한 나라의 인재 배출과 인재 고갈의 순환이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시기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한쪽은 인재 고갈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인재 배출의 시대를 맞이하는 일이 상당한 비율로 일어나는 것이 인간 세계이다.


 

이슬람 측에 유능한 인재가 없었다는 것이 1차 십자군 원정에 성공을 가져다줬다. 하지만 이후 2차 십자군은 얻는 것도  없이 철수하고 만다. 제2차 십자군이 실패로 끝난 해부터 40년간 십자군에게는 재능 있는 인물이 없었고, 반면에 이슬람은 장기, 누레딘, 살라딘으로 이어지는 뛰어난 인재들이 등장한다. 1187년 살라딘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긴다.



다마스쿠스에 있는 살라딘의 동상, 위키백과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왕비였던 아키텐의 엘리오노르는 2차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실망해 이혼한다. 2년 후 후일 헨리 2세라 불리는 열한 살 아래 노르망디 공작 앙리와 결혼하고 둘 사이에 아이들이 태어나는 데 그중 한 아이가 3차 십자군의 영웅 사자심왕 리처드다.


종교 기사단은 십자군 시대에 태어났다. 그들은 신에게 평생을 바친 수도사이자 신을 위해 싸우는 기사였다.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은 1차 십자군 세대의 인물들이 모두 죽어 20년간 확립한 십자군 국가들이 수세로 몰리는 시대에 창설됐다. 2차 원정에서 3차 원정까지 40년이 걸렸기에 그 기간 동안 중근동의 그리스도교 세력은 자력으로 방어를 해야 했다. 그들은 전문적인 전사 집단으로, 성지에 뼈를 묻기로 맹세한 남자들이었다.


템플 기사단은 의료 행위가 목적이었던 성 요한 기사단에 비해 좀 더 광신적이었고 결말도 비극적이었다. 현대로 치면 특수부대 격인 그들은 2차 십자군의 제창자였던 성 베르나르두스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서 외쳤다.


“이슬람교도는 악마의 화신이다. 그들에 대한 해결책은 한 가지밖에 없다. 박멸이 그것이다. 죽여라! 죽여라! 그리고 만약 필요할 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교황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신앙심 깊고 용기 많은 소박한 중세의 남자들이 죽여라! 죽여라! 외치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병원 기사단이라 불렸던 성 요한 기사단은 귀족 출신만 받아들였기에 비교적 학식이 있었다. 종종 폭도 같은 모습을 보였던 템플 기사단에 비해 균형 감각이 있었고 자기 통제가 가능했다.

이슬람교도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전부를 뭉뚱그려 ‘프랑크인’이라 불렀고, 중세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아랍인이든 페르시아인이든 이슬람교도를 무조건 ‘사라센인’이라 불렀다.


3차 십자군의 리더였던 사자심왕 리처드의 행동은 종종 아무 계획 없이 이루어지는 듯 보인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무슨 일을 시작하기도 했지만, 그 결과는 어쩐 일인지 장기적인 이익으로 이어지곤 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리처드는 명예를 걸고 돌진하는 한편 적당한 지점에서 타협할 줄도 아는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1192년 아코에 입성한 리처드 왕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교역 상인의 면을 가진 이탈리아 피사와 제노바의 남자들에게 연설한다.


“서로 협력하여 뭔가를 이루겠다고 결심한 사람들 사이에서 우정만큼 귀한 것도 없고 단결만큼 명예로운 것도 없으며, 융화와 조화만큼 감미로운 것도 없다.

반대로 적대의식만큼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없다. 적대의식은 단결을 무너뜨리고 자기편 사이의 존경심을 잊게 하여 모두를 위험에 빠트리는 싹을 틔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지애로 묶이고 서로에 대한 존경심으로 강화된 조직도,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적 충동만으로 와해될지 모르는 일이다."



사자와 같은 용맹을 지녔다 해서 사자심왕(The Lionheart)이라 불린 리처드.


리처드는 예루살렘 왕이 된 몬페라토 후작 코라도를 십자군에 참가시켜야 했다. 예루살렘 왕은 십자군에 참가하는 것이 권리이자 의무였다. 코라도는 유능한 무장이었지만 신사는 아니었다. 은밀히 살라딘과 접촉하고 있었다.


인간, 특히 다른 사람 위에 서는 자에게는 품격과도 비슷한 무언가가 요구된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해서는 안 된다는 선 같은 것으로, 이 선을 넘어서면 바로 인망을 잃게 된다.
코라도는 난세의 지도자에게 필요한 자질을 대부분 갖추고 있었지만 그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코라도는 끝까지 십자군에 참가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암살단에게 살해당한다.


시칠리아 팔레르모 교외에는 ‘치사’라 불리는 노르만 왕조의 별궁이 있다. 이탈리아어 ‘Zisa’는 훌륭한 멋진 이라는 뜻의 아랍어 ‘Aziz'에서 나온 것인데 시칠리아 섬은 노르만인이 정복하기 전 2백 년 동안 아랍인의 지배를 받아왔다. 노르만인은 피정복자인 아랍인을 추방하지 않았으므로 그 후로도 많은 이슬람교도가 살았다. ’ 치사‘는 그리스도교도인 왕이 이슬람교도 신하들에게 그들 취향대로 꾸며보라고 지시해 만든 여름 별궁이다.

이슬람교도의 꿈은 이 지상, 그중에 낙원에 사는 것이라 이곳에는 그들이 평소 생활하는 곳에 없는 것들이 모두 갖춰져 있다. 맑은 물, 나무, 새와 나비. 흐르는 물이 냉방 역할을 했다. 지금은 물 없이 '분수의 정원'이라 불린다.

저자는 여행을 다닐 때, 순례를 할 때 이런 역사를 알고 찾아가기를  권한다. 알면 보이는 게 있다.




프리드리히는 어린 나이에 시칠리아에서 이탈리아 남부에 이르는 노르만 왕국의 왕이 되었고,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고아로 자란 그는 서민의 자식들과 함께 자라 성년이 되었을 때는 6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엄격한 교사들에게 둘러싸여 교육받지 않은 탓에 호기심과 지식욕이 마음껏 뻗어나갈 수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프리드리히를 6차 십자군에 내보내고 싶었다. 프리드리히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자 교황은 파문을 무기 삼아 그를 몰아붙였다.


프리드리히는 아무리 평화가 목적인 교섭이라 해도 무방비 상태로 이룰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교섭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선 군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가 선박을 준비하느라 출발을 연기한다는 서신을 보내자 교황은 분노해 프리드리히를 파문에 처했다.


역사에 대한 글을 쓰면서 통감하는 것 중 하나는, 정보란 그 중요성을 인식한 자에게만 올바로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십자군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이 점에 대해선 그리스도교도든 이슬람교도든 예외가 아니었다. 정보에 정통한 교황이나 왕, 제후가 있는 반면 그 방면에 어두웠던 교황이나 왕, 제후도 있었다. 베네치아인은 정보를 중요시했고, 제노바인은 그렇지 않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렇게 말했다.
 “현실의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보이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
보고 싶지 않은 현실도 직시해야만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야파, 즉 텔아비브는 이스라엘 제일의 도시다. 한편 가자는 팔레스티나 자치지구로 하마스가 지배하는 도시이다. 두 도시 사이의 거리는 불과 17킬로미터 안팎이다.

21세기인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는 이 거리를 사이에 두고 미사일과 공중 폭격으로 대치하고 있다. 그런데 그 장소에서 지금으로부터 8백 년 전인 1228년에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 공생을 실현하기 위한 교섭이 진행되었다. 그리스도교 세계 속계의 일인자인 황제와 이슬람 세계 속계의 일인자인 술탄에 의해.

이 강화는 양측의 엄청난 반발을 자아냈다.


원래 반대의 목소리는 찬성의 목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법이다.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전쟁의 역사는 전투로만 점철되지 않는다. 여러 차례의 공생 시도와 그에 이은 파탄, 그럼에도 여전히 그곳에서 살아가려 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1096년 은자 피에로의 민중 십자군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2백 년간 8차에 걸친 십자군 원정으로 이어졌고 1291년 십자군 최후의 요새 아코가 함락되며 중근동의 십자군 국가는 최종적으로 소멸하고 만다.


7차 원정에 참가한 루이 9세는 실패자였지만 순교자의 자격으로 성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왕가의 책임은 상쇄되었지만, 프랑스 왕은 책임을 전가할 다른 대상이 필요했다. 그 희생양이 템플 기사단이었다. 템플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은 화형을 당했다. 이미 교황은 ‘아비뇽 유수로 갇힌 상태였다.


템플 기사단, 위키백과

 


70년간 교황은 아비뇽에서 선출됐고, 프랑스 태생 성직자가 교황으로 뽑혔다. ‘카노사의 굴욕’에 반하는 극단적인 교황권의 실추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가 원인이 아니었다. 교황이 한쪽에만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었다.


조직은 항상 복수의 선택지를 손에 쥐고서 어느 한쪽이 강력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중세 유럽에서 대국으로는 신성 로마제국과 프랑스 왕국을 들 수 있는데 교황은 프리드리히 황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지나치게 프랑스 왕의 힘을 강화 사키는 데 도움을 줬다. 그 결과가 '아비뇽 유수'였다.



실패로 끝난 십자군 원정은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 실행 방식에 잘못을 저지른 인간의 책임으로 간주되었다. 교황은 지상에서 신을 대리하는 이였다. 신은 잘못을 범하지 않기에 그 뜻을 전하는 이도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16세기 들어 루터가 의문을 표하기 전까지는.


유일신을 믿는 두 종교의 전쟁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 전쟁들은 영토와 이권을 둘러싼 전쟁에 종교를 덧입혔을 뿐, 일반적인 전쟁과 마찬가지였다.




종교전쟁이지만 신앙이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 같지도 않다. 승리를 이끈 영국 리처드 왕이나 독일 프리드리히 황제가 남다른 신앙을 가진 것 같아 보이진 않으니까. 신심이 좋아 보이는 프랑스 루이 왕의 패전은 얼마나 많은 군사들을 무참하게 죽게 했는가. 교황과 황제, 윗자리로 올라갈수록 종교의 본질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역사책에는 많은 군웅이 할거 한다. 적과 아군 사이에도 믿음과 신뢰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까? 이건 첨예하게 이익이 대립되는 현대 외교에서도 통용되는 답을 줄 것 같다. 진중하고 신실한 인물, 교활하고 비겁한 인물, 전체의 이익을 좇는 이, 자신의 영달만 꿈꾸는 이.

바람직한 인간의 재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일까, 후천적인 노력으로 습득되는 것일까? 드물게 입지전적 인물이 보이긴 하지만 수많은 왕과 제후, 기사를 보면 전자 같아 보인다. 중세는 능력보다 혈통이 중요시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현대는 그렇지 않은 게 세상을 조금 살 맛 나게 한다. 하지만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면  답을 유보해야 할까?


예루살렘의 주인이 그리스도교도에서 이슬람교도로 여러 번 바뀌는 동안에도 그리스도의 묘 위에 세워진 성모 교회는 그대로 살아남았다. 파괴되지도 않았고 모스크로 바뀌지도 않으면서 지금의 형태로 온전히. 그들은 '신을 위해' 싸웠지만 지켜야 할 선은 넘지 않았다.


역사 학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종교는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어차피 종교란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창문 없는 두꺼운 벽돌로 그들은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를 분리한다. 하지만 이런 불합리한 면이 종교를 면면히 이어오게 하는 힘일지 모른다.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송태욱 옮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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