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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Oct 04. 2020

나훈아, 고맙습니다!

매일 떠오르는 소소한 감정들이 소중하다



요즘 들어 부쩍 잠자리에 들 때면 아침을 생각한다. 아침 식사로 따뜻한 우유를 섞은 진한 커피와 통밀빵 한 조각을 먹는다. 과일 서너 조각이나 달걀을 곁들이기도 하면서. 준비할 부담 없는 단출한 식사에 우리는 만족한다. 오후에 마시는 커피는 밤을 곤혹스럽게 하지만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전혀 부담이 없다. 그러니 아침을 떠올리면 나는 행복하다.


-아침에 커피 마시는 순간을 생각하면 행복해. 당신은 어때?

-난, 아니야. 출근해야 하잖아. 아침이 기다려지겠어?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는 삶이 좋지. 이완만 계속되면 그 즐거움을 모르지.

-넌, 좋아하잖아.


남편은 비꼬고 있다. 넌, 매일 집에서 놀잖아. 이 말을 하고 싶은 거다.


-나도 긴장하는데?

-나도 퇴직하면 그렇게 될 거야.

-글쎄, 그럴까?

사실 나는 조금 걱정하고 있다.


이 남자가 그리 반짝이던 머리를 가졌던 남자 맞나, 내가 이럴지 누가 알겠어.


간밤에 나훈아 공연, ‘대한민국 어게인’을 봤다. 며칠 전 2부만 봤기에 아쉬워서 이번엔 알람 맞춰놓고 처음부터 가사 하나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시청했다. 가수의 공연을 이렇게 열심히 재방송까지 본 건 처음이다. 게다가 토르트 공연을.


중고등학교 다닐 무렵이었을 거라. 그때는 남진, 나훈아가 가요계의 쌍벽을 이뤘다. 얼굴이 매끈하게 생긴 남진에 비해서 나훈아는 거무튀튀하게 시골 선머슴 같아 보였다. 그 나이에 남성적 매력을 알아봤을 리 만무했다. 우리 집에서는 다들 “저 푸른 초원 위에~~”를 부른 남진을 더 좋아했다.


세월이 많이 지난 어느 날 나훈아가 부른 ‘사랑’이 귀에 들어왔다. 조금 놀랐다. 아니, 토르트 가수가 이런 곡을 만들다니. ‘사랑’은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차츰 나훈아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어갔다. 작사 작곡이 가능한 가수라는 점이 일반 대중 가수와 달리 보이게 했다. 노래방을 가면 다들 나훈아 노래를 불렀다. 갈무리, 무시로, 영영. 나훈아 콘서트는 비싸고, 빨리 매진되는 걸로 유명했다. 자식들이 부모님께 해드리는 효도선물이라고 했다. 화려하고 볼거리 많아 제대로 돈 값을 한다는 평이었다. 나훈아는 그런 면에서 프로였다.


‘대한민국 어게인’ 공연은 언택트 공연의 새 장을 열었다. 지금까지 공연은 모여 앉은 청중의 얼굴을 비추는 정도였다. 앞에서 PD가 박수를 독려하면 따라 고, 얼굴로 감정을 표현하는 정도였는데, 각 가정에서 공연에 참가하는 대중들의 모습은 훨씬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쳤다. 기뻐하는 모습,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 심지어 세대 간 반응도 느낄 수 있었다. 부모에게 끌려 나와 하품하며 도대체 나훈아가 어떤 가수야, 시들한 표정을 짓다가 후반에는 함께 춤추고 노래하 모습이 무척 재미있었다. 서울, 대구, 목포, 제주 만이 아니라 러시아, 덴마크, 짐바브웨, 일본, 태국, 호주에서 참여하니 그야말로 글로벌했다.


"나라를 구한 건 왕도 대통령도 아니고 국민입니다. 유관순, 안중근, 논개 모두 평범한 국민이에요.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설 자리가 없어요."

이런 말들은 나만이 아니라 시청하는 모든 국민의 마음을 관통했으리라.


"우리는 세월에 끌려가면 안 됩니다. 세월의 모가지를 끌고 갑시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 담긴 말에는 힘이 있었다.

안 해보던 일들을 해보라는 그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남편도 들었을까?


나훈아 공연을 보기 전 시간이 남아 드라마 ‘비밀의 숲’을 봤다. 이 드라마를 보게 된 건 조승우가 연기하는 황시목이란 검사 때문이다. 캐릭터가 독특했다. 그는 뇌수술로 일반 사람들이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에 둔감하고 대신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인지적 면을 예리하게 파악한다. 이런 류의 캐릭터를 본 적 없기에 나는 이 드라마가 흥미로웠다. 그는 대인관계 소통이 서툴지만 시간이 흐르면 상대가 그에게 적응한다. 성격이 극히 단순하기에 드러나는 겉면 뒤를 살필 필요가 없으니 상대도 그러려니 하고 비슷하게 닮아 간다. 황시목을 볼 때마다 나는 남편을 떠올렸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검사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을 깬다.


-검사가 좋은 직업은 아닌 것 같아. 범죄자만 상대하고. 모든 걸 안 좋은 쪽으로 의심해야 하잖아.

-왜? 검사 좋은 직업이야. 드라마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지. 사실은 가정 주부가 제일 좋은 직업이긴 하지.

남자가 오늘 왜 이럴까?


-아니, 주부 중에도 'OO동 아줌마'가 제일 좋지. 우리 동네 고등학교 여자애들 장래 희망이 ‘OO동 아줌마’라잖아.

나는 인심을 썼다. 맞장구를 쳐줬다. 까짓 거 돈도 안 드는데.


그런데 이 말은 사실이다. 한동안 ‘OO동 아줌마’라는 말이 우리 동네를 떠돌았다. 아이들이 보기에 자기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팔자가 좋아 보였던 모양이다. 아이들이 자라면 여자들은 양육의 부담에서 벗어난다. 그것도 한 때이건만, 아이들 눈엔 매일 즐겁게 노는 것 같은 가 보다. 


나훈아 공연을 기회로 우리는 언택트로 친구들을 만났다. 전국으로 흩어진 친구들을 카톡방에서 만나 공연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오래전 한 지역에서 함께 산 인연으로 일 년에 한 번 정도 만나는 부부들이다. 카톡방에 나훈아 공연 보세요, 올렸더니 다들 비슷한 감성을 가져서인지 이미 보고 있었다. '인증 샷'이라며 텔레비전 화면을 찍어 올린 사람도 있다.


-나훈아는 우리의 소중한 보물입니다.

-저희 부부도 옛날 생각하며 보고 있습니다.

-갈무리를 제일 잘 부르는 것 같아요.,

-전, 영영을 좋아해요.

-앤서니 퀸 닮아가는 것 같지 않아요?

-한 번씩 눈 흘기고 외모는 더 산적 같아지고 목소리는 늙지도 않네.

-테스 형도 부르겠죠?

-나이는 몇 살일까요?

-47년생이래요.

-70년 내공이 꽉 차 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우리 모두 저렇게 세월의 모가지를 콱 비틀고 갑시다.


가수 하림이 하모니카 반주자로 깜짝 등장했다. 그는 노동 현장의 안전문제에 사회의 관심을 촉구는 당진 용광로 사고 10주기 노래 '그 쇳물 쓰지 마라'를 작곡했다. "하림을 알바로 쓰다니! 나훈아 대단해." 이십 대 애들이 SNS에 올렸다. 나훈아는 우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주진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우리 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잠시 왔다가는 인생
잠시 머물다 갈 세상
백 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 보면 알게 돼 버린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부질없단 것을

'공'(나훈아 작사, 작곡)



공연 마지막에 나훈아는 대한민국 남자들을 위로하는 곡을 불렀다. 텔레비전 가까이로 남자들을 불러냈다. 나도 남편더러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남편은 엉덩이를 비비적거리기만 하고 얼굴만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나훈아가 "여자들 말고 남편들 앞으로 나오세요." 재차 말했다. 시키지 않은 여자들은 덥석 나오는데, 남자들은 겨우 몇 명 앞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공연을 보는 남편은 행복해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모처럼 우울한 코로나 상황을 잊고 즐겁게 노래에 빠져 들었다.


뭘 남기고 싶냐는 질문에 나훈아가 웃으며 말했다.

-유행가(流行歌)는 말 그대로 흘러 지나가는 노래입니다. 가수는 매 순간 사람들을 즐겁게 웃게 하면 됩니다. 남기긴 뭘 겨요, 그런 질문 하지도 마세요.


나훈아는 역시 상남자였다.


나훈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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