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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Oct 18. 2020

가을꽃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자식이 대학에 진학할 때는 학원과 과외 선생, 대학 입학 전형에 관심이 쏠렸다. 결혼시킬 때는 혼수와 예단, 아파트 시세가 눈에 들어왔. 이제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온통 부모님 잃은 이야기만 들린다.


며칠 사이 나는 이상하게 치매, 노인, 요양원, 죽음, 돌봄에 관한 글들을 읽게 됐다. 차를 타고 지나다가 바깥을 내다보면 이전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요양병원이 보였다. 도시 중심가 삼십 분 거리에 4,5층 높이의 요양병원이 세 개나 있었다. 나는 이제 그 건물 1층엔 가벼운 치매 환자들이 2층 3층으로 올라갈수록 죽음과 가까워진 노인들이 살고 있다는 걸 안다. 어느 병실엔 침대에 묶여 고통스레 누워있는 중증의 치매 환자들이 있을 수도 있다.


간밤에는 SNS에서 아버지 돌아가신 후 혼자가 된 어머니를 이십 대 동생이 돌보고 있어 걱정이라는 누나의 이야기를 읽었다. 댓글이 여든 개나 달린 걸로 보니 다들 남의 일 같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일 년이라도 자기 집에서 어머니를 모셨다가 요양병원에 보내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남편이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동생 집에서 어머니를 돌보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남편은 설거지 하나 도와주지 않고 있다며 이 남자랑 계속 살아야 하나, 회의가 든다고 그녀는 고민을 토로했다. 나는 집집마다 연세 드신 부모님 문제로 비슷한 고민을 겪고 있지만, 힘든 이유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부부는 각자 다른 방에서 잔다. 이 습관은 몇 년 전 손자를 돌볼 때 시작됐다. 아기를 끼고 교대로 잤는데, 아기를 딸네 집으로 보내고 나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코 고는 소리, 잠꼬대를 안 들으니 숙면하기 좋았다. 자다가 코 꼬집혀 잠 깨지 않아도 되니 남편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렇게 각자 다른 방에서 잔 지 어느덧 2년이 넘었다. 이따금, 오래전 어떤 모임에서 나이 든 남자들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늙어도 귀찮아하지 말고 꼭 남편과 한 방에서 자라고 내게 충고했다. 남자들은 혼자 자다가 죽을  불안해한다나. 


엄마를 묻고 돌아온 저녁 나는 멍하니 내 방에 누워 있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와 또 달랐다. 누구를 그리워한다는 게 나는 낯설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잠자리에 들 때면 엄마가 꿈에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엄마가 간밤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그냥, "엄마! 엄마!" 불러 보고 싶다. 그러고 보면 엄마는 내게  정을 많이 줬는지 모른다. 여러 겹의 감정이 차 올라 자꾸 눈물이 났다. 이따금 동생과 언니, 가족들의 여러 힘든 상황이 떠올라 다른 슬픔이 한 슬픔을 덮기도 했다. 슬픔은 시도 때도 없이 밀려왔다. 하지만 누구에게든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작년 9월, 동생은 아침에 현관을 들어서는 엄마를 봤다. 엄마는 맨발이었다. 그날 엄마는 빌라의 맨 위층부터 내려오면서 모든 집의 벨을 눌렀다. 엄마는 집세를 받으러 갔다고 말했다.

-있는 집 치매야.

동생은 농담처럼 웃었지만, 우리는 불안했다. 엄마가 어디로 뛰쳐나갈지 모르니까.


그날 이후 현관에는 엄마 이름표가 걸렸고, 현관 키도 열쇠 키로 바꾸었다. 거리에서 헤매던 엄마를 요구르트 아줌마가 데리고 오기도 했다.


한 번 정도 남편에게 운을 뗀 적이 있다.

동생이 힘드니, 잠시라도 내가 모셔 볼까?

-아니, 넌 못 모셔. 아들이 모시다가 정 힘들면 요양 병원 보낼 수밖에 없어.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솔직히 마음은 반반이었다.

엄마를 모시는 동안 겪게 될지 모를 마음의 상처가 두려웠다. 남편이 그리 말해줘서 다행으로 여기는 얄팍한 이기심도 있었다.


치매는 어느 날 걸리고 안 걸리고 딱 부러지게 구분되는 게 아니었다. 서서히 조금씩 진행되다가, 어느 날은 심해지고, 어느 날은 정신이 반짝 돌아오고 다. 나는 거르지 않고 쏟아질 엄마의 말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그리 쉽게, 치매 걸렸으니 병원에 보내야 된다고 말할 순 없었다, 자식 입장에선.




거실에 있던 남편이 자꾸 내 방을 기웃거렸다. 아내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한지, 자기 마음을 종잡을 수 없어서 그러는 건지.

자꾸 들여다보는 남편에게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도 서운하지?

-그렇지, 뭐.

남편 얼굴에 스산한 기색이 스쳐갔다.


장모와 사위는 혈연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으니 남편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아니, 그도 괴로워 보였다. 백년손이라 불리는 사위라 조심스레 대한 게 두 사람 사이에 좋은 추억만 남게 했는지 모른다.


엄마는 사위가 약밥과 수육을 좋아한다고 여겼다. 남편은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편이었는데 엄마는 집에 온 첫날 식사하는 걸 지켜보다가, 가 이 음식들을 특별히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친정에 가면 엄마는 항상 이 두 가지 음식을 만들어 놓았다. 나중에 직접 만들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시장에서 사서 내놓았다.

결혼 초 남편은 음식을 많이 먹지 못했다. 자꾸 먹으라고 부추기는 장모 탓에 집에 돌아오면 남편은 위가 부담돼서 죽겠다고 끙끙거렸다. 세월이 지나면서 뱃골이 커져  먹는 양도 늘어났다. 맛있게 먹으면 엄마는 흐뭇해했다.


엄마는 9년을 혼자 사셨다. 남동생이 수발을 들었지만 남편이 있는 거랑은 달랐다. 그러고 보면 나이 들수록 부부보다 소중한 관계는 없는 것 같다. 부부는 자식이 채워줄 수 없는 걸 준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엄마 치매도 덜했을 것 같다. 사이가 좋든 나쁘든 종일 누가 곁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크다. 


시부모님은 아직 살아계신다. 두 분은 아흔셋 동갑이신데, 사이가 무척 좋으시다. 시댁 건넌방에 자려고 누우면 두 분 말씀이 자장가처럼 들린다. 새로울 것 없는, 우리가 다 아는 옛이야기를 두 분은  주무시기 전까지 되풀이하신다. 부부는  말하고 들으며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받았다.


언니는 오래전에 형부와 갈라섰다. 헤어진 후 두 딸을 언니가 키웠다. 다행히 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아서 여러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었다. 딸들은 이제 의젓한 사회인이다. 어려서 고생을 해서인지 아이들이 단단하다. 작년 봄 언니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병원에서 임종 때까지 형부를 돌봤다. 언니는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밥을 해 먹였는데, 그 사람 따뜻한 밥 한 번 못 해준 게 가슴 아프다." 했다.




나는 그날 밤 남편 방으로 건너갔다.

-당신이 침대에 들어와서 그런지 어젯밤에는 좀 따듯하더라.

아침에 남편이 말했다.

'그동안 추웠단 말인가? 가을이라 그렇겠지.'


지만 우리는 앞으로 한 방에서 잘 것 같다.


-우리 세대는 결국 대부분 요양 병원에서 죽게 될 거야. 조금 나은 병원이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남편 말이 맞을지 모른다.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 걸까?

아침 식탁에서 물으니 남편은 대답이 없다.

침묵이 길어져 나는 남편을 바라봤다.


-무슨 말을 듣고 싶니?

남편의 물음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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