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인 Nov 19. 2020

사유리? 샤오미?

알츠하이머


며칠 전 나는 어떤 단어 하나가 떠오르지 않았다.

'' 이름인데… 레이건 얼굴만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단어가 맴맴 돌아다니기만 했다. 할 수 없이 다음날 아침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그 병 이름이 생각이 안 나. 레이건이 걸린 병인데.

-알츠하이머?

-맞아.


그리고 다음날 아침, 어제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병 이름을 떠올리려는 순간. 다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조금 화가 났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책상에 앉아 곰곰 생각하니, 기억이 났다. 옆에 놓인 메모지에 ‘알츠하이머’라고 적어놓았다.


오후에 음악을 듣고 싶었다. 며칠 전 아들이 카톡으로 보내준 음악이 떠올랐다. 슈만. 피아노 연주 앨범이었다. 그런데 앨범의 하늘색 표지는 눈에 선한데 연주자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연이어 그러니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의자에 앉아 천천히 생각해보니 연주자는 백건우였다. 나는 '알츠하이머'라 적힌 메모 옆에 ‘백건우’라고 적었다.  


며칠째 사유리의 ‘비혼모’ 이야기가 SNS를 뜨겁게 달궜다. 대체로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마흔여덟에 어떻게든 아기를 낳아 키우고 싶은 여자에 대해서 누가 뭐라 하겠는가.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칭찬하는 의견이 많은데, 원래 약간 반골 과인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만일 사유리 씨가 비혼모가 아니라 미혼모였으면 반응은 어땠을까?  

아기를 가지고 낳는 것에는 다른 점이 없지만 반응은 갈렸을 것 같다. 왜 우리는 익명이 제공한 정자에는 후하지만 이름을 드러내는 정자에는 후하지 않을까? 거기엔 섹스가 배제되어있기 때문 아닐까? 혹시 우리는 유명 연예인의 성생활에 대해서는 지극히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예기치 않게 아기를 가져서 미혼모로 살 것인가, 낙태를 할 것인가, 고민하는 많은 여성을 나는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혼모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우리는 제공하고 있는가? 혹시 우리 마음이 비혼모는 받아들이지만, 미혼모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닐까?


오래전 이런 사례를 어느 미국 여배우의 경우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배우 이름이 또 떠오르지 않았다. 학벌이 좋다. 아카데미 여주 주연상을 받았다. 어떤 '방'에 대한 영화를 찍었다. 이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당연히 여배우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검색에 들어갔다. 영화 제목을 먼저 검색해 본다. 홀, 아닌가? ,이었나? 이것도 아니다.


후배가 검색하는 나를 보고 웃었다.

-최소한 귀한 손가락은 아니시네요.

-그게 뭔데요?

-우린 그걸 ‘핑프’라 해요.


핑프는 ‘핑거 프린세스’의 준말로 손가락으로 검색해 찾아보지 않는다는 걸 말하는 거라 했다. 다행이었다. ‘라테는’은 즐겨 쓰지만 검색은 잘하니까.

저녁에 소파에 기대서 나는 줄곧 여배우를 검색했다. 결국 미국 여배우 이름을 가나다 순으로 정리해놓은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름을 보니 금방 기억이 되살아났다. 조디 포스트였다. 영화는 패닉룸. 그녀는 오래전에 사유리 씨의 경우와 같은 방법으로 아기를 낳았다. 사람들은 아기의 아빠를 그녀와 관계가 좋은 멜 깁슨으로 추정하기도 한다나.


'사유리' 생각나지 않았다. ‘샤오미’가 불쑥 떠올랐다. 샤오미는 중국 전자회사 이름이다. 어디선가 들은 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온다. 후배에게 실수한 이야기를 하면서 '샤오미'라 말한다는 게 ‘사오미’라 했다. 후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창피해서 급히 수정했다.


신기하게도 메모한 건 그림으로 기억하는 것 같았다.


무조건 메모해야 해. 우리의 기억을 이젠 믿을 수 없어.

남편에게 말했더니 다음날 아침에 카톡에 이런 게 날아왔다. 남편이 보냈다.


KB국민은행, NH투자증권, 과학기술인 공제회, 삼성생명, 국민연금.


우리의 전 재산이 들어 있는 곳이라나.

기억 못 할까 봐 보낸다 했다.


나는 카톡방에 들어온 문자를 메모 방으로 옮겼다. 나중에 어디 저장해놓았는지 모를까 봐.


『스키너의 심리 상자 열기』(에코의 서재)에선 알츠하이머에 걸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한다. 어차피 조용히 막을 내리는 게 인생이라며.




작가의 이전글 『침실로 올라오세요, 창문을 통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