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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Nov 17. 2020

『침실로 올라오세요, 창문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단편선



감옥은 정글이다.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 뒤에서 나를 공격하는 적을 막아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안락한 잠을 자게 지켜줄 누구. 어느 날 그가 내 침대로 기어들어왔다. 만일 그가 없다면 나는 하루도 못 버틴다. 그런데 그가 내일 감옥을 나간다. 녀석은 내게 말하지 않았다. 누가 알겠는가. 녀석의 석방을 아는 순간, 칼이 그의 등을 찌를지. 대부분 그렇게 희망에 부풀어 있다가 찰나에 죽었다. 녀석은 내가 모르는 줄 안다. 녀석은 마지막 순간에 말하겠지. 내 도움이 필요하니까. 녀석에겐 재빨리 짐을 챙겨 던져 줄 사람이 필요하다.


며칠 전 읽은 라틴아메리카 단편 ‘짧은 작별’을 떠올려 봤다.

등장인물은 나와 가끔 '친구'로 불리기도 하는 동료이다. 스토리는 일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회상은 몇 번 반복되지만 실제 사건은 어제와 오늘 이틀간 일어난 일이다. 소설 속에 독자를 향한 수수께끼가 숨어 있다. 서사는 임팩트하며  반전의 묘미가 있다. 인간의 속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앙헬 산티에스테반 프라츠의 단편 ‘짧은 작별’의  첫 문단을 나는 다시 옮겨본다.



내 동료는 오늘 석방된다. 그의 출소는 내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내일 내 차가운 몸은 천천히 의무실로 옮겨질 것이고, 피부색은 혈관에서 피가 모자라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나의 적들은 꼬챙이로 나를 여러 번 쑤시고, 내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또 내가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보며 한층 더 복수를 즐기기 위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흐르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아무도 감히 나를 도와달라고 교도관들을 부르지 못할 것이다. 나 같은 꼴 당하기 싫어서 모두가 윗대가리들의 결정을 존중할 것이다.


그는 질곡의 역사를 지닌 국가의 국민으로 짊어져야 할 고통을  주인공을 통해 묘사했다. 이 단편은 쿠바 감옥 죄수들을 소재로 쓴  단편집 맨 끝에 실려있다.





'광기와 분열, 관능과 신비, 실험과 파격!'이라 쓰인 책 표지에 나는 '자연과 인간'을 넣는다. '거침없이 하이킥'도.


아우렐리아를 위한 묘약(푸에르토리코)
원격 사랑(볼리비아)
트로이로, 엘레나여(페루)
짧은 작별(쿠바)
코끼리에 관한 우화(멕시코)

...


『침실로 올라오세요, 창문을 통해』에는 열다섯 편의 라틴 아메리카 단편이 실려 있다. 라틴 아메리카는  다양한 문화적, 문학적 전통을 지난 나라들이 혼재해 있다. 이 책을 엮은 클라우디아 마시아스 교수는 ‘금기를 깨뜨리는 대담함과 용기’란 말로 이 단편선을 표현했다.


이 책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말을 나는 찾지 못한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으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만났다. 그 책을 아직 기억하는 이유는 제약 없는 자유로움 때문이다. 이승과 저승, 인간과 동물, 작가의 사고는 막힌 데가 없었다. 놀라웠다. 라틴 아메리카는 어떤 나라인가?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가? 이후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을 읽었다. 내게 라틴 아메리카 문학은 마르케스와 아옌데가 전부였다.


글쓰기 공부를 하는 어느 청년이 표지가 너덜너덜한 이 책을 늘 바지 뒤춤에 꽂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궁금했다. 무엇이 그를 잡아당겼을까.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지니고 다니며 계속 되풀이 읽을까.

 글쓰기의 원천은 호기심인지 모른다.


맨 앞에 실린 ‘아우렐리아를 위한 묘약’을 읽고 나는 한동안 책을 덮어놓았다. 읽지 못할 여러 사정도 있었지만 낯선 것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곳, 파타고니아. 홍수가 마을을 덮친다. 정원사 루카스는 물에 떠내려가는 창녀들의 시신을 수습한다. 그에게 그들은 익숙한 이웃일 뿐이다. 우리는 어떤 이를 영웅이라 부를까. 식물을 살릴 줄 아는 루카스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


시간이 흐른 후 두 번째 단편 ‘원격 사랑’을 읽었다.


에드문드 파스 솔단의 ‘원격 사랑’은 1996년 칠레에서 발간된 유명한 단편집 『마콘도』에 실린 작품으로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편지와 단편을 결합시킨 구조,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불분명한 메타픽션의 유희 속에서 화자인 주인공의 이중인격이 드러난다. …파스 솔단은 “작품이 혼란스럽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다. 이는 독자가 내 허구 세계에 빠져들어 허구를 진실처럼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클라우디아 마시아스


한국인과 결혼한 멕시코인, 클라우디아 마시아스 교수는 서울대학교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가르친다. 그녀는 네루다, 보르헤스, 마르케스, 이사벨 아옌데, 이외의 작가들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소개하고 싶어 한다. 이 책에 작품이 실린 작가들은 1960, 70년대 출생으로 아홉 개 스페인어 권 나라에서 세계적인 문학상을 받았다.


클라우디아는 이 단편들에 일련의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죽음을 향한 질주, 패러디와 아이러니, 선배 작가들의 작품 세계 파괴, 시간에 대한 실험, 담화 전략,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의 유희, 현실과 글쓰기의 갈등. 그녀는 한국의 독자들이 이 단편선 속의 새로운 세상들을 논리적으로 납득하려 하기보다는 읽고 즐기기를 바란다.


이 단편선의 기원은 2006년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주최로 열린 국제 콜로키움이다. 이 모임에서 서울대 라틴 아메리카 연구소 연구원인 우석균 박사는 많은 스페인어권 작가들이 이메일과 블로그를 통해 활발히 교류한다는 걸 알게 된다. ‘마술적 사실주의’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전부가 아니라고 걸고넘어진 서문으로 유명해진 단편집 마콘도가 출간된 지 십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는 국내에 라틴 아메리카 현대 문학을 소개하고 싶었다. 작품 선정을 클라우디아 교수에게 의뢰했다.  


인간의 속내를 홀랑 뒤집어 탈탈 틀어 보이는 게 소설이다. 소설은 도덕이나 관습 사회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원시 동물 같은 인간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쓰기 쉬울 것 같기도 하고, 쓰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내 안에 지금까지 형성되어 있는 벽을 하나씩 넘어트리면 새로운 길이 펼쳐질까?


소설 쓰기는 창문을 통해 침실로 들어가는 일인지 모른다.




#『침실로 올라오세요, 창문을 통해』마이라 산토스 페브레스 외 지음, 클라우디아 마시아스 엮음, 우석균 외 옮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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