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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Nov 03. 2020

부소담악(浮沼潭岳)에서 만난 사람

가을 소풍


친구가 가을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마흔 넘어 운전을 시작한 그녀는 큰 교통사고를 한 번 겪은 후 특이하게 담이 커져 전국 곳곳을 누비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됐다. 우린 각자 행동반경이 달라 서너 달에 한 번 정도 만난다.


어디를 갈까? 옥천 쪽으로 가 볼까?

전날 밤 전화를 한 후 나는 옥천과 대청댐 인근 식당을 검색하느라 두어 시간을 보냈다. 식당을 정한 후 부근을 산책하고 돌아오면 될 것 같았다. 제법 알려진 식당은 사람들이 보글보글하다는 평이었다. 그런 곳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한적한 곳에 가고 싶었다. 부소담악이 눈에 띄었다.


-언니, 전 맛집보다는 주먹밥 하나 먹고 돌아다니는 게 더 좋아요.

하지만 밥을 사주고 싶은 나로선 그러기가 어려웠다. 일단 출발하자.


큰 느티나무가 우리를 맞았다. 시골 마을 입구에는 이런 나무가 항상 있다. 오래된 나무는 둥치가 썩었지만, 여기는 내 영역이야 하듯 우람하게 낙엽 위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오후에 만난 전직 마을 이장은 이 부근에서 밥을 먹으면 늘 배앓이를 했다고 말했다. 사람들 마음에 믿음을 심어주는 신령스러운 장소는 오래 산 나무가 만드는 걸까? 사람들의 기원이 모여 만들어지는 걸까?


소로 입구에 나란히 서 있는 장승을 지나 걸어 들어가다 별장 같은 집을 만났다. 예쁜 작은 집이라 하려다 우리는 집의 뒤뜰을 보고 부러움에 입이 벌어져 발길을 멈추었다. 넓은 잔디 깔린 정원 앞이 바로 호수였다. 무릎 높이로 쳐진 금지선을 성큼 넘어 들어가 커피 한 잔 마시며 앉아 있으면 어떤 느낌일까? 막상 주인은 자주 바깥에 나오지 않을지 모른다. 저런 풍경은 우리처럼 가끔 보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법이다. 집은 인적 없이 고요했다. 넓은 잔디밭과 집은 호수의 습기에 젖어 있었다.

 




길가에는 검은 꽃만 남은 모란, 가슬가슬하게 말린꽃을 매단 수국이 바람에 흔들고 있었다. 꽃이 진 가을 나무에서 나는 봄꽃을 떠올렸다. 추소정을 찾아 데크 길을 올라가니 정자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옛 것과 새 것.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양쪽이 달랐다. 호수 위에 길게 섬이 떠 있었다. 산 아래에 절리 같은 바위가 나란히 보였다. 마을이 수몰되고 산이 물에 잠겨 나무가 썩자 산 주인 일곱 명이 배를 타고 나무를 모두 베어냈다 한다. 썩은 나무를 끌어내리자, 자갈이 떨어지고 바위가 드러났다니 아름다운 풍광은 그저 생긴 게 아니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박스에 갓 딴 것으로 보이는 표고버섯을 담아놓은 식당에 들어갔다. 파전과 함께 나온 막걸리를 한 잔 마시자 옛 생각이 났다. 옥천에는 막걸리 양조장이 있다. 오래전 지금은 이곳에서 홍차 가게를 하는 지인 집에서 모임을 한 적 있는데, 그때도 이 막걸리를 마셨다. 옥천 막걸리는 시중에서 판매하는 막걸리랑 맛이 다르다. 신선해 마치 요구르트를 마시는 것 같다. 물론 많이 마시면 취한다. 그때 멋모르고 마셔서 모두 정신을 거의 잃었다. 옛 일이다.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마시지 않는다. 마실 수도 없다.


 막걸리 두 잔에 나는 수다쟁이가 됐다. 옆 테이블에 대각선으로 앉아 식사하던 가게 주인이 친구랑 내가 하는 말을 유심히 듣는 것 같았다. 가게 안에 그림이 많이 걸려 있었다. 큼지막하게 신문을 확대해 붙여놓은 게 있어서 우리는 이 그림들이 가게 주인 박찬훈 씨가 그린 거라는 걸 알게 됐다. 그는 이곳에서 67년을 살았다.


2018년 부소담악을 그리러 온 화가들을 위해 배를 몰던 그는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다. 8월이라 볕이 뜨거웠다. 목원대 교수인 박석신 교수가 풍경을 그려보라며 종이 석 장을 건네줬다. 수몰된 이평리 갈벌 마을이 고향인 그는 그날 이후 부소담악을 그린다.



박찬훈 작, 부소담악



부소담악 찻길 건너에 절이 하나 있었다. 세심정 본산이라는 황룡사다. 특이하게 길을 콘크리트로 만들어놓았다. 어딘지 분위기가 음산하다고 싫어하는 친구를 끌고 들어갔다. 나는 절 안이 궁금했다. 산 위에 오십구 정도의 비석이 있었다. 국군 장병 위령비 같았다. 왜 이곳에 위령비가 있을까? 목탁소리에 까마귀들이 공중에서 춤을 췄다.

11월 1일을 가톨릭에서는 모든 성인 대축일이라 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2일은 사자를 위해 기도하는 위령의 날이다. 우린 예기치 않게 만난 영혼들을 위해 우리 식의 짧은 기도를 바쳤다.

커피 마실 곳을 찾지 못해 가게로 돌아온 우리는 안주인에게서 이 비석이 일본으로 징용 가서 죽은 군인들의 유골을 수습해서 모아 온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박찬훈 씨가 그린 마을 그림, 맨 아래 호수를 정원으로  둔 집만  특이하게 이름이 없다


열심히 준비해서 찾아가는 여행도 즐겁지만 예기치 못한 곳을 찾아가 낯선 사람에게서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 건 여행의 특별한 기쁨이다.


돌아오는 길, 가로수의 단풍을 보고 싶은 친구는 굽이진 호숫길을 찾아 쌩하니 차를 몰았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사방에 금빛을 뿌렸다. 절에선 아무렇지 않았던 내가 이번에는 계속 헛발질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공포를 느끼는 지점이 다른가 보다.


달리는 차 안에서 부소담악을 떠올렸더니 점묘화로 그린 그림과 병풍 같은 바위가 늘어선 호수가 뒤섞여 풍경을 보고 온 건지 그림을 보고 온 건지 어찔어찔했다.



#부소담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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