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인 Nov 02. 2020

기순 씨 이야기

벚꽃 잎이 하얗게 바랜 날



  기순 씨가 김치를 선보이기 시작한 건 올여름부터다.

난전의 작은 대야에 김치가 대여섯 봉지 담겨 있었다. 오이김치, 겉절이, 열무김치. 골고루 몇 봉지씩 담겨 있는 게 팔고 남은 야채를 저녁에 버무려서 다음 날 갖고 나오는 것 같았다.


  “이젠 김치까지 팔아요? 부지런도 하네. 밤에 쉬지도 않나 봐.”


사람들이 타박하면 그녀는 사람 좋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놀면 뭐하누.”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새로운 도전거리가 생겨서인지 기순 씨는 전보다 생기 있어 보였다.  


  “갑자기 애들이 내려왔는데, 김치가 똑 떨어졌네.”

  “아유, 김치 없으면 안 되제. 얼른 사가세요. 이래 봐도 이거 내가 정성 들여 담근 거예요. 열무김치도 살짝 젓갈이 들어가야 해요. 나는 항상 좋은 젓갈을 쓰잖아요.”

  그녀는 수더분하고 능청맞게 오랫동안 김치를 팔아온 사람처럼 선전도 곧잘 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기순 씨네 난전은 다른 가게보다 좀 비싸지만 싱싱하고 좋은 물건만 팔았으니까.


   이십 년 전 아파트가 들어설 무렵 기순 씨는 상가 앞에 야채 난전을 펼쳤다. 그 날부터 난전은 쉬는 법이 없었다. 급히 슈퍼를 달려가다가도 새파란 대파나 하얗고 통통한 무를 본 사람은 아이고 반가워라, 하며 얼른 방향을 틀어 사 가곤 했다. 그녀는 나물도 쪽파도 다듬어 팔았다. 손이 노는 법이 없었다. 좀 비싼가 싶다가도 음식을 만들다 꼼꼼하게 뿌리 쪽을 칼로 다듬은 걸 보면 “고맙기도 하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된장과 잡곡류, 치자 물에 절인 단무지, 도토리묵도 있고, 명절에는 감주도 선보였다. 이런 것들은 주변에서 맡긴 물건들이다. 기순 씨는 야채 난전 가장자리에 그런 물건들을 늘어놓고 큰 이문 남기지 않고 팔곤 했다. 판로를 찾지 못한 물건들이 기순 씨를 통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갔으니 서로 좋았다.


  기순 씨는 희끗희끗한 커트 머리, 햇볕에 탄 넓적한 얼굴에 눈이 상그레 하다. 허리에는 전대를 찼고, 몸빼 바지를 입었다. 처음에는 어디선가 멀리서 차를 타고 오는 눈치 더니 어느 틈에 우리 아파트 옆 동에서 걸어 나왔다.

몇 해 전에는 하나 있는 아들이 명문대학에 합격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동안 기순 씨 아들 이야기로 아파트가 떠들썩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지만, 기순 씨의 경우엔 그렇지 않았다. 엄동설한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한여름에도 낡은 담요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장사하던 그 아닌가. 홀몸으로 힘들게 키운 외아들의 일이라 우리는 너나없이 그녀를 축하했다.


  몇 년이 지났다. 겉보기에 아파트는 변한 게 없다. 십 분 거리에 새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옮겨가는 사람, 이사 오는 사람들 몇몇이 있을 뿐. 해마다 다정하게 봄꽃이 폈고, 여름이면 아이스크림을 물고 아이들이 지나갔고, 가을이면 벚나무의 두꺼운 잎이 붉게 물들어 도로 위를 덮었다. 봄 같이 따뜻한 겨울도, 귓전이 얼 정도로 추운 겨울도 있었다.


  어느 날, 기순 씨 난전이 문을 닫았다. 지나갈 때마다 동그마니 모아서 비닐로 덮어 놓은 살림살이에 눈이 갔다. 무심코 찾아왔다가 난전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닫힌 가게가 기순 씨 마음 같아 지나갈 때마다 나는 마음이 쓸쓸했다. 언제 나오려나? 그녀가 보이지 않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다섯 달쯤 지났을까? 땅에 떨어진 벚꽃 잎이 하얗게 바랜 날, 기순 씨는 다시 난전을 펼쳤다.


   “독한 사람이야. 그러고도 어떻게 일을 해!”

  사람들이 수런댔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딸기를 사러 온 여자 둘이 기순 씨 앞에서 넋두리 중이다.


 “애들 키울 때는 요, 이렇게 잘 생긴 딸기가 한 번도 내 입에 들어온 적이 없어요. 늘 애들 입이 먼저였죠. 이제야 나 먹으려고 이런 딸기 사잖아요.”


  폭신폭신하게 잘 익어서 누르면 붉은 기가 손에 묻을 것 같은 딸기가 서너 걸음 떨어져 서 있는 내게도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옆에 있던 여자가 딸기 사는 친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마 기순 씨도 봤을 거라.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엄마 입도 입이지요. 맛있는 거 아이들만 주지 말고 많이 드셔요.”


  딸기를 사 들고 가면서 여자 둘이서 실랑이를 했다.

  “왜 옆구리 찌르고 그래?”

  “너, 모르니? 저 집 이야기!”

  “뭐?”

  “아들이⋯⋯.”

  “왜?”

  “하이구야. 너, 저 집 소식 진짜 모르는구나.”

  두 여자는 걸어가며 계속 작은 소리로 수군댔다.


  다음 날, 깍두기를 담으려고 난전에 들렀더니, 무가 한 개 천오백 원이었다. 두 개만 사려는데 기순 씨가 떨이라며 네 개를 봉지에 담더니 오천 원만 달라고 했다.


  바구니를 드니 묵직해서 어깨가 휘청했다.

  “제법 무겁네요.”

  “그럼. 돈은 무거운 거야.”

  기순 씨가 씩씩하게 말했다.


  저만치 앞에 기순 씨가 걸어가고 있다. 양손에 든 봉지는 밤에 담근 김치 같다.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다리를 끌며 걷는다. 기순 씨는 오늘도 난전에 출근한다.


(푸른솔문학 2020년 여름호)





작가의 이전글 2인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