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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Nov 28. 2020

여행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을까

수용과 거절



사진 속의 나는 표정이 매일 다르다. 지친 표정이 조금씩 더해간다. 여행이 힘들었을까? 계획은 꼼꼼하게 세웠는데.


다섯 명이 3박 4일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

가기 전엔 좋았다. 여행에 대한 기대가 불편에 대한 예감을 덮었다.

십 년 이상 한 지역에서 함께 살았던 친구들인데 제주에 도착한 지 하루가 지나자 나를 제외한 모두가 같은 고향 사람이란 깨달음이 왔다.

이전에 나는 한 번도 그들의 고향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적이 없었다.


툭툭 터져 나오는 '우리 지역 사람들은'을 듣노라니, 차츰 불편해졌다. 나를 의식하고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안다. 흔히 듣는 말인데 이상하게 여행 와서 친구들에게 들으니 귀에 콕콕 박혔다.



섭지코지 글라스 하우스 앞에서 바라보는 성산 일출봉



콘도에는 방이 두 개 있었다. 허리 아파서, 코 골아서 2인 침대를 혼자 사용해야 하는 큰 언니. 우리는 여기서 잘 게요, 하며 친한 두 사람이 작은 방에 손잡고 들어갔다. 운전하는 친구가 불편한 얼굴로 소파에 잠자리를 만들었다. 나는 작은 방에서 두 사람 틈에 끼어 자려고 이불을 펴다가 생각을 접었다. 거실 소파에서 그녀를 혼자 자게 할 순 없었다. 그녀 옆 거실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잠이 안 와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는데 화장실 팬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였다. ‘소변보러 갔나 보다.’ 그러고 한 시간. 뒤척이며 잠을 청하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뭐 해요?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화장하던 이가 분칠 한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남편이 일곱 시에 출근해서 저는 다섯 시면 일어나요.

-잠 좀 잡시다.


그녀는 화장실 문을 닫고 화장을 해야 했다. 거실에서 자는 이들에게 그 정도의 배려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평소 가족과 친정, 시가에 무한대로 헌신하는 그녀인데, 의아했다.

막내는 자동차만 타면 고개 끄떡이며 취한 듯 잤고, 운전하는 이는 그 모습을 견디지 못했다. 화살이 날아갔다.


슈퍼에 들렀을 때 한 친구가 양상추를 샀다.

-뭐하게요?

-아침에 먹어야 해요. 그래야 화장실 가요.


다음날 서귀포 올레 시장에 갔을 때도 그녀는 양상추를 찾았다.

한 끼 안 먹으면 어때, 여행은 불편하려고 는 건데.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녀 덕분에 잘 먹긴 했다. 사과를 돌돌 말아먹은 양상추는 맛이 좋았다.


-당근도 사야 하는데.

바로 앞에 빨갛게 씻어놓은 당근이 있었지만 그녀는 마뜩지 않아했다.

늦은 저녁 시간이라 얼른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기에 나는 그녀를 재촉했다.


택시 안에서 그녀가 볼멘소리를 했다.

-전, 저렇게 씻은 당근이나 껍질 벗긴 대파는 사지 않아요.

-식당에서 밥 사 먹지 않아요? 거기서 먹는 거 다 저런 거예요. 수돗물로 밥 짓고...


친구는 세탁 세제까지 유기농을 쓴다. 아이들을 그렇게 키웠다. 평소에 나는 ‘절대 유기농' 신봉자인 친구의 먹거리 선택에 은근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먹는 식품을 사는데 남들에 비해 너무 비싼 값을 치르는 게 어쩐지 불편했다. 친구는 늘 최상품 과일을 산다. 나는 상처 난 과일도 사고, 장에서 국산인 줄 알고 중국산을 사기도 하는데 때론 중국산이 괜찮다는 생각도 한다.

예전 중국 여행 갔을 때 큰 슈퍼를 들렀는데, 깨랑 녹두의 품질이 아주 좋았다. 중국 농산물에 대한 고정관념이 바뀌었다.


음식이 짜다. 맛이 2프로 부족하네. 말을 들으면 음식을 뜨던 숟가락이 멈칫한다. 맛있어도 입을 다물게 된다. 여긴 별로군. 영 아니네. 하면 흥미롭게 보던 경치도 갑자기 시시하게 빛바래 보인다.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들이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마지막 날, 욕실 딸린 방이 세  있는 리조트에 들어갔을 때 나는 친구들에게 선언했다.


-제일 좋은 방을 내가 쓸게요. 이틀간 거실 바닥에서 잤으니까.


창밖으로 동백꽃이 보이는 방에서 나는 혼자 하룻밤을 보냈다. 


운좋게 업그레이드로 롯데 아트 빌라스 96평을 얻었다.



여행하면서 보는 게 경치만은 아니었다. 앞면만 바라보던 친구들의 옆면과 뒷면을 봤다. 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익숙한 이들의 낯선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상대 눈 속의 티만 보느라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  아닐까.


이들과 다시 여행할 수 있을까?


개성 강한 다섯이 처음으로 나흘을 함께 보냈으니 날카로운 모서리에 모두 상처를 입었다. 그들도 나처럼 이 시간을 돌아보고 있을지 모른다. 

함께 하는 여행은 모난 돌들을 자루에 넣어 흔들어대는 것과 같았다. 모서리가 깎인다. 다음엔 지금보다 낫지 않을까?



제주 방주교회. 터줏대감으로 보이는 까마귀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방주교회를 둘러싼 물에는 건물과, 하늘, 구름과 얼굴도 보인다.


여행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일상과 유리된 사흘, 우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의 영혼이 만난 지점은 있을까. 우리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걸까. 세상의 어느 한 부분이라는 걸 인식한 때는 있었을까. 여행의 낯섦과 불편함이 우리를 변화시킬까. 우리는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고향, 가족, 나라, 세계.


여행에서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나 썰렁해진 카톡방에 아침 식탁 사진과 노래를 올렸다.

여행에서 먹었던 양상추 샐러드, 그리고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 노래를.



양상추 샐러드를 곁들인 아침 식사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 오라는
진실한 사랑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함께하는 여행은 멋진 풍광을 보고 맛난 음식을 먹는 일이라기보다는 자기 존재의 가치를 깨닫고 상대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매 순간 수용과 거절을 선택하면서.


시간이 망각의 은총으로 서걱거리는 불편함을 잘 정리해 주리라 믿는다. 후일엔 우리가 딛고 지나간 발자국 따라 좋은 추억만 남게 되겠지.



함덕 해수욕장




#제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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