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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22. 2020

느릅나무 춤(Elm Dance)을 추다

그늘의 때죽나무는 아래로 꽃을 피운다


“내가 모두 가지고 가마, 어머니는 그러셨어요.”


“그게 무슨 의미예요? 가지고 간다는 건 뭘 말하는 거예요?”

내 물음에 여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술, 여자, 도박 같은 거요. 가족 중에 그런 사람이 많았거든요. 어머니는 내가 모두 끌어안고 가마, 하셨어요.”


처음 만난 사이였다.  

습지 탐방을 마친 후 간단하게 소감을 나누는 시간에 그녀는 자신의 나이를 말했다. 그리고 나무를 보니 삼십 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 생각이 난다고 했다. 난, 그때 그녀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다. 몇 사람 건너 다가올 내 순서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궁리하느라.


습지를 빠져나오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건 단순히 그녀가 나랑 같은 나이라는 게 떠올라서였다.


“저랑 같은 나이세요.”

“그래요?”

반가운 듯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다시 시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폐암 선고를 받았을 때 어머니는 쉰다섯이었어요. 4년 6개월을 앓다 돌아가셨는데, 마지막 일 년을 제가 돌봤어요. 병원 치료를 거부하셨죠. 그 시간 어머니는 고통이 어떻게 사랑이 되는지를 제게 보여주셨어요.”


“그건 이해가 잘 안 되네요. 고통은 고통일 뿐 아닌가요?”


“너무 고통스러웠죠. 남편은 그런 어머니를 볼 때마다 하느님을 원망했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오히려 기쁨이라 하셨어요."


난 알 것 같기도… 모를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시어머니를 계속 옆에서 지켜봤어요. 제 평생의 멘토는 우리 시어머니예요.”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나눈 건 느릅나무 춤 때문인지 모른다.


그날 참석자들은 숲 해설가, 생태환경 운동가, 재속 프란치스칸들로 평소에 숲과 자연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습지를 돌아본 후 마지막으로 우리는 둥글게 손을 잡고 원을 그린 후 음악에 맞추어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며 느릅나무 춤을 췄다.


느릅나무 춤(Elm Dance)은 인간을 위해 죽은 나무를 기억하는 춤이다. 1986년 소련 체르노빌 핵 발전소(현재,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최악의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사람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핵구름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느릅나무 숲에 방사능의 비를 뿌렸다. 사람 대신 많은 느릅나무가 죽었다. Elm Dance는 그 느릅나무를 기리기 위해 만들진 춤이다.


우리가 춤을 춘 곳에는 하늘을 향해 길게 뻗은 나무들이 많았다. 사람들의 느린 춤사위가 고요한 숲의 대기를 갈랐다. 어디선가 숲의 정령이 살그머니 우리를 엿보는 것 같았다.


2년 전쯤, 대전 도심에 습지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지인이 다니는 회사가 건물을 이전하는데 월평 습지 가장자리 구간을 조금 침범해야 했다. 시의 반대에 부딪친 회사는 결국 세종시로 가게 됐다.


"기업체가 낼 세수가 얼만데, 바보같이."

그때 우린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전에 근 삼십 년을 살았어도 이전에 월평공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들어도 관심이 없어서 지나쳤는지 모른다.


친구가 월평공원에 습지탐방을 간다길래 따라나섰다. 팬데믹으로 오랜 시간 들어앉아 있었기에 바람도 쐬고 숲이 내뿜는 신선한 기운을 마시고 싶었다.


'전국 유일의 도심 속 습지라니!'

궁금하기도 했다.


갈수록 봄은 짧아진다. 5월이어도 한낮은 벌써 여름이었다.





습지 가장자리엔 이미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있었다. 위치로 봐도 제법 값나가는 땅이다. 경제 논리로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습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을까?


길 가장자리  바윗돌 틈에서 자란 때죽나무가 길 위에 하얀 꽃을 별처럼 뿌렸다. 사진을 찍으려다 보니 꽃은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꽃은 빛을 찾아 몸을 구부린 걸까? 그늘진 숲이어서 강 쪽에서 스며든 햇살이 길게 때죽나무 아래로 귀한 빛을 드리웠다.


다리 위에서 조망한 습지는 도솔산을 끼고 갑천이 뱀처럼 휘돌아 곳곳에 여울과 소를 만들었다. 봄이면 개구리와 도롱뇽이 연못에 보글보글 알을 띄우고, 희귀한 어류가 강 밑을 쏜살같이 헤엄치고, 깊은 숲에서 끼룩끼룩 새들이 소리 내어 우는 곳.


그나마 2년 후엔 생태호수공원으로 이름이 바뀐다니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는 생물도 생기겠다.


많은 사람이 지구를 걱정한다.

하지만, 아래를 향해 꽃을 피우는 때죽나무처럼 지구는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하나 둘 생물이 사라지고, 어느 틈에 인간이 사라질 뿐.




#월평공원 습지  #느릅나무 춤  #공동의 집,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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