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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24. 2020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고?

그 숲에는 뱀이 있어요


매번 다니던 산책길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지 두 달째. 인적 드문 길이라 무서웠는데 차츰 익숙해졌다. 길은 날마다 새로운 것들을 보여줬다. 숲 사이로 흐르는 강물. 풀 우거진 습지. 새들이 금방 날아오를 것 같은 나무. 맞은편에는 금빛 갈대가 사람 키보다 높이 자라 바람에 서걱댔다. 맑은 날, 흐린 날, 비 오는 날, 산책로는 풍경이 달랐다.


풀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부스럭거리는 폼이 혹시 지난번에 본 고라니인가 싶어 숲 속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한 손에 뭔가를 들고 있는 남자가 허리까지 올라오는 풀을 발로 헤치며 나무 위 여기저기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사진을 찍고 있는 걸까? 그런데, 거긴.

말해주려다 마음을 접었다. 나 같으면 절대 그 숲 속엔 들어가지 않는다.


“죄송하지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숲에 있던 남자다.


“혹시 여기에 비행기 떨어진 거 못 보셨어요?”

“아, 그 비행기.”


며칠 전부터 산책로 하늘에 모형 비행기가 날아다녔다. 두 대가 어찌나 시끄럽게 날다가 비틀다가, 다리 교각 아래를 교묘히 빠져나가다가, 온갖 묘기를 부리는지, 국군의 날인 줄 알았다. 맘 카페에서도 야단이 났다.

"전쟁 나는 거예요? 갑자기 웬 비행기 소리가 이렇게 들려요?"

모형 비행기라고 알려주려다 참았다. 신고한다 할까 봐.


한 시간 넘게 남자는 숲을 뒤지고 다닌 것 같았다. 산책로에 들어섰을 때 이미 비행기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니까.

“오늘은 못 봤는데요.”

남자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가려다 나는 돌아서서 남자에게 말했다.

“거기 뱀 있는 곳이에요.”

“아하!”

남자는 깜짝 놀라더니 목례하고 사라졌다.




작년에 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공부를 했는데 모인 연령 층이 다양했다. 삼십 대 중반부터 시작해 사오 십 대, 칠십 대까지 있었다. 나는 그중 나이 든 축에 속했다. 자식 같은 아이들이랑 공부하는 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대화의 접점을 찾는 게 어려웠다. 그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글을 써서 미리 카톡방에 올리면 읽고 와서 합평하는 시스템이었는데, 마치고 나면 간단한 술자리가 이어졌다.


각자 술값을 냈는데 이따금 나이 드신 분들이 “말은 줄이고 지갑은 열라 했어” 하며 술값을 떠맡기도 했다. 그렇게 내는 돈은 대략 일이십만 원 정도였는데, 한 번 그렇게 내고 나면 그들은 다음 술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도 내야 할까? 고민했지만, 나이 많다는 이유로 지갑을 열고 그들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돈은 등 떠밀려 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베풀고 싶을 때 내는 거라 생각했다. 그건 일종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하고 싶은 말도 별로 참지 않았다. 그럴 거면 모임에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 일 년 정도 다녔는데, 내 작품을 합평 한 날만 술값을 부담했다.


시간이 흐르며 우린 자연스레 네 명 정도의 그룹을 형성했고, 그 무렵엔 나도 은근히 그들과 정이 들어 한번쯤 우리 동네 맛집에 불러서 밥을 사주고 싶었다. 센터 근처 식당들이 별로였다.







“우리 집 근처에서 한번 모일까요?”

내가 말을 꺼냈다.


“그래요. 그럼 아저씨도 한 번 나오라 하시죠. 밥값도 내주시고….”

“…”





아이들이 중학교 다닐 무렵, 나는 갓 마흔을 넘긴 나이였다.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마흔이란 나이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 한 번은 뜬금없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엄마는 몇 살까지 살 것 같아?”

딸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돌아서서 동생과 한참 속닥거렸다.

“65세요.”


열다섯 살이 생각하기에 65세는 엄청 많은 나이였으리라. 이건 지금 생각이고, 당시엔 깜짝 놀라서 “엄마는 25년만 살면 죽어야 하네” 하며 많이 섭섭해했다. 세월은 쏜살같아 이제 머지않아 아이들이 말한 나이가 된다.  


예전 어떤 자리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왔는데 어떤 분이 65세 이상은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말했다. 망각의 은총이란 게 있다는 데, 난 왜 이런 걸 시시콜콜 기억하고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얼른 머릿속에서 자기 나이를 셈한다. 그이는 지금 몇 살이 되었을까? 그도 머지않아 투표권을 반납해야 한다.


자주 다닌 길이어서 그 숲에 뱀이 있다는 걸 알았다. 풀숲을 그렇게 밟고 다니면 뱀에게 물릴 수 있다는 것도.

알려주려다 망설인 건 선의가 오지랖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말하려는 건 대체로 그런 거다. 그들은 걱정이 많다. 살아온 시간만큼 본 것도 아는 것도 많아진 거다. 그러니. 그들에게 입을 다물라 하지 마시라.


어떤 모임에서 연사가 노인들에게 기부를 요청했다.

"지갑 속에 돈 넣어두면 뭐합니까? 그거 은행 돈이에요. 베풀고 가세요."


연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은 지갑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건 마음이다. 기부를 요청할 때는 그 돈이 정말 필요하니 도와달라고 해야 한다. 제대로 쓰일 것이라는 확신도 줘야 한다. 노인들은 그리 쉽게 노후의 안전망이 될 돈을 내놓지 않는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날갯짓하게 멍석을 깔아줘야 한다.

나이와 상관없이 베푸는 게 자선이다. 그러니 나이 들었다고 지갑을 열라 해선 안 된다. 더군다나 젊은이가 노인의 지갑을 열라 말라 말할 자격은 없다.


마지막으로 책을 한 권 소개할까 한다.

2년 전쯤, ‘추석이란 무엇인가?’ 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 명실상부 신문 칼럼계를 평정한 서울대 김영민 교수의 책이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어크로스, 2018년)







#우본성의 선한 천사 (스티븐 핑커, 김명남 역, 사이언스북스, 2014)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어크로스,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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