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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Dec 16. 2020

미타쿠예 오야신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


이른 아침 친구가 문자를 보냈다.

요즘 분노 게이지가 높아서 가족들에게 해서, 돌아서면 미안하다고 했다.

온화한 성격인 친구는 서울로 이사 간 후 친구들과 헤어져 한동안 우울해했다. 우린 남들이 '라테'라 흉보건 말건  말건 이런저런 이야기로 분노를 증폭시키다가 우리 세대는 괜찮지만 다음 세대가 걱정된다는 이야기로 대화를 마친다. 마음이 스산하다.


강변의 갈대가 바람에 누웠다. 새들이 무리 지어 시옷자로 날아간다. 선두가 지치면 뒷 녀석이 앞으로 날아가 역할을 맡는다. 뒤쳐진 서너 마리 새도 열심히 무리를 쫓아간다. 겨울 들녘의 풍경이다. 12월을 인디언은 ‘무소유의 달’, ‘침묵의 달’이라 했다. 한 해의 마지막을 맞아 욕심을 내려놓고 집착을 흘려보내라는 뜻 같다.


춥다.

오전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데 현관 밖에서 택배 아저씨가 벨을 누른 채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공동현관 비번을 모르나 보다.


"어서 들어오세요."

아저씨가 허겁지겁 들어온다.


청소 아주머니가 음식물 쓰레기통을 물로 씻고 있었다. 쭈뼛쭈뼛(쓰레기 버릴 땐 아무도 안 마주쳤으면…) 다가가니 장갑 낀 손으로 내가 든 쓰레기통을 성큼 앗아 간다.


"아니요, 아니요. 제가 할 거예요."

"청소하는 중이니까요. 이리 내놓으세요."

쓰레기통을 비우고 수세미로 쓱싹쓱싹 문질러 물 한 바가지 끼얹어 준다.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이를 만났다. 도우미 아주머니 같다.

"아이고, 추워라."

"조심하세요."

한 마디씩 건네고 마스크 쓴 채 웃음을 주고받는다.

날씨는 차가워도 사람들의 온기가 몸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몇 년 전 도서관에서 부피 큰 책을 발견했다. 920 쪽. 빌릴까 말까 망설였다. 읽다가 포기할 것 같았다. 김영사에서 발간한 류시화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란 책이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는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린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잉잉대는 꿀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의 기억과 가슴속에서는 모두가 신성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인디언의 말은 모두 ‘시’였다. 삶의 철학이 숨어 있는 은유.

책은 술술 잘 읽혔다. 친구들에게도 권했다. 그해의 마지막 달, 일 년간 읽은 책들을 돌아봤을 때 이 책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강한 눈빛, 당당하고 행복한 표정의 인디언 가족사진과 함께.


 




사제 서품을 석 달 앞두고 아들이 옷을 벗은 친구가 욥기를 읽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그녀가 한 수많은 기도는 어디로 갔을까. 친구는 욥기에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같이 걸었다. 그날 밤, 나도 성경을 펼쳤다.


사탄과의 내기로 하느님이 욥을 치자 욥은 모든 것을 잃는다. 아들과 딸, 하인, 재산.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으로 찬미받으소서.
(욥 1,21)


욥이 찬미하자 하느님이 사탄에게 말한다.

-거 봐라. 욥은 그 일을 당하고도 한결 같이 나를 경외하지 않느냐.


사탄이 말한다.

-사람이란 제 목숨을 위하여 모든 소유를 내놓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를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느님이 허락하자, 사탄이 욥의 몸을 친다.

고약한 부스럼이 욥의 온몸을 덮는다.


욥의 아내가 말한다.

-당신은 아직 그러고 있어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


욥은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사탄의 말처럼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자신인지 모른다. 욥처럼 주어진 걸 순응하며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기원전 7세기 앗시리아 왕 사르다나팔은 바빌론 성이 함락될 위험에 처하자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수많은 후궁뿐 아니라 개와 말까지 살아있는 것은 모두 죽이라고. 그는 적의 손에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넘어가는 걸 참지 못했다. 모두 죽인 후 왕궁에 불을 지르고 자신도 목숨을 끊는다.



사르다나팔의 죽음, 외젠 들라크루아(1827년), 루브로 박물관  


이 작품은 전시될 때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바라보는 화가의 차갑고 냉정한 시각이 19세기 사람들에게 너무나 비도덕적이고 퇴폐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리 보일까?


내 눈엔 그리 놀랍지 않다. 자신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순식간에 낯을 바꾸는 이들을 본다. 인간의 내면에는 자신의 것을 파괴하면서까지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저열한 욕구가 있다.


 없는 , 나 없는 가 가능할까.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질문을 던져본다. 인디언들은 그 답을 알고 있었을 텐데.


 "미타쿠예 오야신."

인디언 타고타 족의 인사말이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뜻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류시화,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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