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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an 14. 2021

아니무스(Animus)의 강이 흐르게 하자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클라리사 에스테스, 손영미 옮김, 이루


늑대와 함께 여인이 달린다.


책 표지를 보노라니 오래전 본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 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가 인디언을 미개하고 잔인한 종족으로, 늑대는 사납기만 한 동물로 그렸다. ‘늑대와 함께 춤을’에서는 ‘주먹 쥐고 일어나’란 이름을 가진 지혜로운 인디언 여자와 인간과 영혼의 단짝이 되는 늑대, ‘하얀 발’이 등장한다. 한 편의 영화가 이전에 진실이라 믿었던 것들이 모두 조작된 것이고 인간의 사고를 편협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우리가 이전에 받았던, 여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교육도 할리우드 영화와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인생의 매 순간 우리는 결정을 해야 한다. 진로를 결정하고, 이 남자와 결혼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을.

해 질 녘 언덕 너머에서 다가오는 컴컴한 모습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헤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다가갈까? 도망가야 하나?


딸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우리 집은 시끄러운 닭장 같아졌다. “왜 이렇게 매일 싸우니?” 남편이 짜증을 낼 정도였다. 그때까지 결정의 주도권은 엄마인 내게 있었는데, 이 무렵부터 딸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둘 사이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학교나 집이 아닌 곳에서 딸은 매사에 순종적인 착한 아이였는데 유독 나에게만 사납게 대들기 시작한 것이다. 딸은 북한 김정일이 무서워서 못 쳐들어온다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우리는 엄청 심하게 싸웠고, 딸은 비를 맞으며 집을 뛰쳐나갔다. 딸이 집을 나간 지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먼저 옥상으로 올라가 딸의 흔적을 찾았고, 아파트 아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뛰어가는 여학생 못 봤냐고 묻고 다녔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 때 딸은 남편 손에 이끌려 치킨 봉지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출장에서 돌아오던 남편이 심상찮은 분위기로 비 맞으며 지나가던 딸을 우연히 만나 치킨 가게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했다. 후회와 안도감. 그날 나는 앞으로 딸에게 이길 생각을 접어버렸다. 이후 우리는 별로 싸운 적이 없다. 지나고 보니 그 시기는 딸이 성인으로 독립하는 시기였다. 결정의 주도권도 딸에게 넘어가 몇 번의 진로 결정도 딸이 했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은 융 심리전문가인 클라리사 에스테스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쓴 책이다. 1992년 미국에서 출간했고, 2013년 한글 번역 초판이 발행되었다. 여성의 잠재력에 대해 쓴 책으로 여성학의 외연을 넓혔다는 평을 듣는다.


작가는 여러 시대, 여러 지역에서 전해져 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늑대의 뼈를 모으는 라 로바, 여자를 밝히는 푸른 수염, 바바야가와 바살리사, 쌍둥이 자매를 얻은 마나위, 미운 오리 새끼, 빨간 신. 물개 이야기는 나무꾼과 천사 이야기와 흡사하다. 늑대 배를 갈라 아기 염소를 꺼내는 우리네 옛이야기만큼이나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들이 많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작가는 예리하게 분석한다.


엄마가 숨을 거두자 아니나 다를까 (신데렐라, 콩쥐 팥쥐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재생되는 이야기 소재다) 아빠는 두 딸이 있는 과부와 재혼을 하고 곧 여행을 떠난다. 바살리사는 하녀가 된다. 의지할 것은 엄마가 남겨준 인형뿐. 계모는 숲 속의 마녀 바바야가에게 바살리사를 보내 죽이려 한다. “불씨를 얻어 오너라.”

갈림길이 나오자 바살리사는 인형에게 묻는다.

“어느 길로 가야 하니? 오른쪽이니 왼쪽이니?”

“이 쪽으로 가세요.”


숲 속의 마녀 바바야가는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불씨를 줄 수 없다고 한다.

“빨래하고 마당도 쓸고 썩은 밀과 성한 밀을 가려놓아야 해.”

“걱정 마세요.”

인형이 도와준다.


바바야가가 바살리사에게 해골 불씨를 준다.

집에 들고 온 해골이 밤사이 계모를 태워 버린다.  


바살리사 이야기는 어머니가 딸에게 물려주는 여성의 직관의 힘을 담고 있다. 직관은 번개같이 빠른 통찰력이고 감각이며 지혜다. 직관의 힘은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여성의 내면에 사장된 채 버려졌다. 사용되지 않아 폐기되기도 했고, 때로는 근거 없는 오명 때문에 감춰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의 본능적 직관은 결코 사라진 적이 없다.


늑대는 새끼들이 어릴 때는 안전한 곳에서 뒹굴며 키운다. 사냥을 배울 때가 되면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고 잘 따라 하지 않으면 한쪽으로 밀어버린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바살리사처럼 비난의 소리를 뒤로 하고 숲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바살리사의 인형은 본능을 상징하는 보배 같은 존재이다.


엄마가 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유산은 자신의 직관에 대한 믿음이다. 직관은 이성과 무관한 희한한 기벽이 아니라 진정한 영혼의 목소리이고 가장 이로운 존재이다. 직관은 자기 보전을 도울 뿐 아니라, 다른 이의 동기나 본심을 알아차리고, 심리의 분산을 막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 이런 심리적 능력을 가진 여성은 동물과 같이 기민하고 거의 초인적인 예민함과 여성스러움을 지니며 자신 있게 살아갈 힘을 갖게 된다. p112


융 심리학에서는 여성 내면에 있는 남성적 에너지를 ‘아니무스(Animus)’라고 한다. 이 힘은 주체적 인생을 사는 여성들의 심리적 에너지이다. 아니무스가 강하고 큰 여성들은 더 쉽고 능동적으로 자기 생각을 실현하고 창조적인 일을 해 낸다. 반면 아니무스가 미숙한 여성은 생각은 많지만 조직력이나 실천력이 부족해 세상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저자는 아니무스가 남성적인 힘이 아니라 남성들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친숙하고 여성적인 힘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부정적인 아니무스의 영향을 받으면 창조적인 일을 할 때마다 고통을 받는다. 내면의 힘이 사라져 공부, 운동, 사랑의 고백도 하지 못하게 된다.


 “네가 작가니?”

“정말 글 쓰는 재주가 있는 거니?”

"책을 뭐하러 만드니?"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겠니?”

사회는 여러 방식으로 아니무스를 약화시킨다.


생명의 강이 맑아져야 창의력이 되돌아온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창조하는 작품의 질이 아니라 창조적인 생활 그 자체다. 글쓰기, 회화, 사고, 치유, 행동, 요리, 대화, 미소 뒤에는 항상 이 창의력의 강이 흐르고 있다.… 여성들이 창조적인 일을 할 때는 유난히 눈이 빛나고, 말씨가 명랑해지며, 머리카락이 반짝이는 듯 보인다. 여러 가지 가능성과 열정으로 벅차오르는 이때는 큰 강물처럼 자신의 길을 따라 외부로 흘러나가야만 충족감을 얻을 수 있다. P287



창의력의 강이 흐르게 하자. 어떻게 혼탁해진 강을 정화할 것인가?

남의 격려와 도움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민함, 야성적인 생활. 여러 생각이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첫 단계에서 아무것도 억압하지 않아야 한다. 일단 시작하고 실패하면 다시 하고 또 실패하면 다시 한번 도전해야 한다. 우리를 실패에 빠트리는 건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실패한 다음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 비겁함이다.


의무나 책임감 때문에 해야 하는 일만 하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영혼에 유익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중요한 것은 시간, 소속감, 열정, 자신감이다. 이런 것들이 창의력의 강을 깨끗이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야성을 회복하는 일은 금지된 감정을 되살리는 것이다. 성에 대한 이야기는 심리의 깊은 곳을 건드린다. 모든 것을 느슨하게 만들고 뼛속까지 야성적인 즐거움을 준다. 그런 웃음은 우리를 치유해준다. 성은 영혼을 치유하는 약이고 신성한 존재다. 외설적인 이야기가 치유의 능력이 있다면 이 또한 신성한 이야기다.




저자는 여성의 삶은 칠 년을 주기로 달라진다며 일정한 패턴을 제시한다.

 

여성의 연령기 별 특징

0~7세: 신체와 꿈

7~14세: 분리의 단계

14~21세: 새로운 육체

21~28세: 새로운 세계

28~35세: 어머니의 나이

35~42세: 탐구자의 나이

42~49세: 노년기의 초기

49~56세: 지하 세계의 나이

56~63세: 선택의 나이

63~70세: 파수꾼이 되는 나이

70~77세; 다시 젊어지는 나이

77~84세: 영적인 나이

84~91세: 심홍색 실을 짜 넣는 나이

91~98세: 초월의 나이

98~105세: 공기와 숨결의 나이

105: 초시간적인 나이


사춘기 때 딸과 나의 갈등은 유년기의 친절한 엄마를 떼내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딸은 훌쩍 자랐다. 직관적으로 딸은 엄마와 자기를 분리시켰다. 결혼 후 딸은 몇 번의 큰 결정을 해야 했다. 남자라면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결정을 여자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해야 할 때가 많았다. 나는 시원스레 조언을 해주지 못했고, 딸은 고민 끝에 자기가 좋아하는 길을 선택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해발 이천 미터 고원 지대에 늑대가 산다. 아프리카 유일의 늑대 서식지이다. 원래 늑대는 산 아래 서식지에 살았다. 숲이 있고 잡아먹을 사슴이 있는 곳. 차츰 인간에게 밀려서 늑대는 고원 지대까지 올라왔다. 이곳에 늑대가 먹을 수 있는 건 쥐와 같은 설치류 밖에 없다. 그들은 굴을 파고 쥐 죽은 듯 숨어 지낸다. 늑대의 특징은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 늑대는 무리를 짓지 않는다. 그러다간 굶어 죽는다. 환경에 맞춰 이곳의 늑대는 생존 방식을 바꿨다. 낮이면 늑대는 흩어져 설치류가 들어가 있는 구멍 앞에 잠복한다. 기다렸다가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그리고 밤에 무리에게 돌아온다. 늑대는 그렇게 환경에 맞춰 살아남았다.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 수 있을까? 며칠 전 나는 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나치게 완벽주의를 추구하느라 삶에서 잃어버리는 게 있지 않나 걱정이 되어서. 딸은 어머니의 나이이고, 나는 선택의 나이이며 파수꾼이 되어가는 나이이다. 딸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니 은근히 미안해졌다.



*아니무스: 생각, 의견, 판단. 어떤 일을 판단하고 실행하게 하는 에너지.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클라리사 에스테스, 손영미 옮김,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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