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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an 23. 2021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사회주의와 파시즘, 동전의 양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대공황 시대, 한 진보 단체의 의뢰를 받은 조지 오웰이 북 잉글랜드 탄광지대 노동자들을 두 달간 밀착 취재 후 쓴 르포르타주다.


‘위건’은 작은 탄광촌인데 오웰이 찾아갔을 당시 부두는 사라지고 없었다. 역자는 책의 제목이 '밑바닥 사람들도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강변 휴양지)로 가는 길'을 의미하지 않겠냐고 추측한다.


 1903년 ‘하급 상류 중산층(그의 말에 의하면)’으로 태어난 오웰은 장학금으로 사립 명문 이튼을 마친다. 대학 갈 형편이 되지 않은 그는 식민지 인도의 ‘제국 경찰’에 지원한다. 5년 만에 영국으로 들어온 그는 이 근무 이력에 대한 죄책감으로 2년간 런던과 파리에서 자발적인 부랑자 생활을 한다. 스물일곱 살, 글을 쓰기 시작한다. 1937년 작가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그는『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발표한다. 이 책은 상당한 논란을 일으킨다. 그 직후 오웰은  ‘파시즘에 맞서 싸우러’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다. 부상을 입고 돌아온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는 '병역 부적격'으로 참가하지 못해 시민군으로 활동한다. BBC에 잠시 근무한다. 아내를 사별한 1845년 여름 『동물 농장』을 발표한다. 3년 후 『1984』를 발표하고, 1950년 마흔여섯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진짜 놀라운 거리는, 지하에서 수평으로 이동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거리다. (…) 갱도 밑바닥에서 막장까지의 거리는 1.5킬로미터 정도라면 평균쯤일 것이고, 5킬로미터도 보통에 속하며, 8킬로미터나 되는 탄광도 여럿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거리는 지상에서의 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1.5킬로미터든 5킬로미터든,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주요 통로를 벗어나면 거의 없으며, 주요 통로라 해도 없는 경우가 많다." p37




‘실업을 다룬 세미 다큐멘터리의 위대한 고전‘이라는 평을 듣는 이 책은 광부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뛰어난 기록 문학이다. 오웰은 '필러(채워 담는 사람, 막장꾼)'를 따라 막장으로 들어간다. 필러는 높이가 1미터 남짓한 갱도를 속바지만 입은 채 기어서 이동한다.


"광부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알려면 탄광 밑에서 벗고 일하는 모습을 봐야 한다. 그들은 대부분 덩치가 작지만 거의 모든 신체가 대단히 빼어나다. 널찍한 어깨는 점점 가늘어져 미끈하고 유연한 허리로, 그리고 작고 도톰한 엉덩이와 근육질의 허벅지로 이어지며, 단 1온스의 군살도 없다. (…) 벗은 몸에 시커먼 모습이면 모두 똑같아 보인다. 단, 청년의 신체, 그것도 근위병 수준의 몸이 아니면 누구도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허리에 군살이 몇 파운드만 있어도 계속해서 허리를 굽혔다 펴는 동작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단 보고 나면 다시는 잊을 수 없는 광경이다. 온몸이 시커메진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놀랍도록 힘차고 빠르게 삽을 휘둘러 석탄을 뜬다." p34~35


이 자세로 광부는 시간당 2톤 분량의 석탄을 파낸다.


광부들의 삶, 주택 문제, 실업 수당, 생활비 지출 내역까지 세밀하게 분석한 그는 의문을 가진다.


“왜 그들은 건강에 좋은 통밀 빵 한 조각 대신 실속 없이 비싼 차를 마실까?”

이는 공황기에 사치가 늘어나는 현상과 비슷하다. 잠시의 착각, 행복감, 결핍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는 욕망. 전후에 값싼 사치가 늘어난 현상을 그는 영화, 라디오, 진한 차, 축구, 도박이 혁명을 막는 것과 같다고 한다. 실업 문제를 개선하지 않으려는 지배층의 술책이라기보다는 시장을 확대하려는 제조업자와 고통을 완화하려는 배고픈 사람들의 형편이 맞아떨어져 생긴 현상이라고 본다.


“실업을 대하는 중산층과 노동자의 태도는 왜 다른가?”

중산층은 처음에 실업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수치스러워한다. 그러다가 차츰 놀라고 멍한 상태로 자신의 운명을 방관한다. 그들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자괴감에 시달리고 스스로를 불명예스러운 패배자로 여긴다.

그에 반해 하류층은 일자리를 잃는다고 망가지지 않는다. 실업 수당을 받으면서 결혼하는 것에도 거부감이 없다. 가족 제도도 유지한다. 실업자라고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다. 운명에 저항하기보다는 그럭저럭 견디기로 한다.




사회주의자인 오웰은 자발적 부랑자 생활로 계급 간 벽을  없애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는 부랑자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계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며,  기껏해야 자신의 편견을 어느 정도 없앨 수 있을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누구나 자신은 무슨 신기한 수가 있는지 그런 편견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속물근성이란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는 확인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큼은 예외인 악덕이다. ‘믿음과 실천’을 겸비한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인들은 적어도 자신만큼은 계급적 불의를 당연히 벗어나 있는 줄 안다." p211


“나는 사회주의자의 진짜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품곤 한다. 그것이 누군가에 대한, 특히 자신과는 동떨어진 부류인 노동 계급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기는 어려울 때가 많다. 내가 보기에 사회주의자들의 숨은 동기는 병적으로 심한 질서의식일 뿐이다. (…) 그들이 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장기판 비슷한 무엇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p240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부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혁명이란 그들이 어울리고 싶어 하는 서민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똑똑한 ‘우리’가 하층 계급인 ‘그들’에게 부여할 일련의 개혁인 것이다.(…) 희한한 것은 거의 모든 사회주의자 작가들이 타고났거나 선택해서 자기가 속한 계급에 대해 그토록 쉽게 분노를 터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p242


"여기 평생 대등한 조건에 근접하는 노동자와 단 한 번도 말을 해본 적이 없는 상류계급 출신의 문인이 있고, 그가 같은 ‘부르주아’ 계급을 향해 독기 가득한 비방을 퍼붓고 있다. 왜 그럴까? 겉으로 봐선 순전히 악의 문이다. (…) 그런 책들이 내는 순전한 효과는 공산주의에는 ‘증오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인상을 외부에게 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공산주의와 가톨릭 주의가 희한하게 닮았다는 사실과 마주친다. (…) 공산주의와 가톨릭 신자가 똑같은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보면 둘은 상당히 비슷한 것이다." P244


오웰은 사회주의자에 세 부류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빈곤을 없애기 바라지만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노동계급 사회주의자.

둘째, 도시에서 뿌리 없이 자란 중산층 출신의 지금의 문명을 가라앉히려는, 책으로 훈련받은 지식인 사회주의자. 이 유형에는 아래의 사람들이 섞여 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부르주아를 규탄하는 이들, 지금은 대유행이라 공산주의자지만 5년 뒤에는 파시스트가 되어 있을 운동권과 문단의 눈치 빠르고 젊은 신분 상승자들, 죽은 고양이에게 파리 꼬이듯 ‘진보’의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온갖 시시한 족속들.

세 번째, 사회주의의 ‘근본’ 취지에 공감하는 평범하고 수수한 사람. 오웰은 어느 심각한 사회주의 정당에도 자기 같은 부류를 위한 자리가 없다는 인상을 받는다.


책 말미에서 오웰은 경고한다. 그릇된 사회주의가 파시즘을 키운다며.


“사회주의자는 지적인 사람들이 흔히 반대편에 선다는 사실과 직면하면 그것을 부패한 동기 탓으로 돌리기 쉽다. (…)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로부터 물러서는 이유는 사회주의가 ‘통하지’ 않을 듯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통할 듯해서 반대하는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의 생애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사회주의가 현실화되는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p251


영국의 가장 유능한 마르크스주의자 작가인 N.A. 홀더웨이는 말한다.

“공산주의가 파시즘을 낳는다는 유구한 전설이 있으니.… 즉,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것을 지배계급은 민주적인 노동당 계열의 세력이 더 이상 노동 계급을 단속하지 못하여, 자본가 독재는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형태를 띠어야 한다는 경고 신호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와 파시즘은 동전의 양면인지 모른다. 거울에 비친 얼굴.

파시즘은 결국 알 수 없는 사회주의자가 무엇을 하든 그 반대로 하겠다는 결단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잘못 드러내면 지식인들을 파시즘 쪽으로 쫓아버리는 위험을 저지르게 된다. 사람을 질려버리게 해서 사회주의자라면 무조건 화를 내며 거부해버리는 방어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전통과 질서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단 파시즘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요령 없는 사회주의자들의 선전만 잔뜩 듣다 보면 파시즘을 유럽 문명의 장점을 지킬 마지막 방어선으로 보게 되기가 아주 쉽다. 심지어 한 손엔 몽둥이를 들고 다른 한 손엔 약을 든, 상징적으로 최악인 파시스트 깡패도 자신을 강패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파시즘이 어디서나 약진한다면 그것은 우선 사회주의자들 자신의 잘못이란 점을 인정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경제적인 면에만 눈이 멀어 있어서, 인간에게 영혼이란 게 없다는 가정에 따라 활동해 왔으며 노골 적으로 건 암시적으로 건 물질적 유토피아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말았다. 때문에 파시즘은 쾌락주의와 '진보'라는 값싼 관념에 반발하는 모든 충동을 이용할 수 있었다." p288


 오웰은 파시즘이 머지않아 저절로 사라질 거라고 예측하지 않는다. 파시즘에도 바람직한 면이 있고, 그런 부분이 사회주의에도 있다고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함께 목표로 삼고 단결할 수 있는 이상은 사회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상 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자유’다. 이 이상은 이론 일변도의 독선과 파벌 다툼과 설익은 '진보주의'에 층층이 묻혀 버렸다. 똥 더미 속에 감춰져 버린 다이아몬드가 되어버린 셈이다. 사회주의자가 할 일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정의와 자유 말이다!" p290


관찰, 의문, 이해. 오웰은 하류층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보다 나은 주거를 제공할 방법은 없을까? 허물어진 탄광 촌에도 저녁마다 모여서 술 한 잔 나눠 마실 주점이 있고,  바닷바람을 쐴 수 있는 부두가 있다면?

그들에게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해줄 방법을 모색한다.


한 지식인 사회주의자의 진지한 고뇌가 엿보이는 책이다. 무늬만 사회주의자인 이들의 위선, 그 때문에 파시즘으로 흘러갈 사회에 대한 염려. 책의 후반부는 오웰이 악마의 대변인의 자격으로 설익은 좌파 지식인들을 통렬히 비판하는 내용이어서 책을 의뢰한 이들의 심기가 많이 불편했다고 한다.


#위건부두로가는길, 조지 오웰,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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