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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an 28. 2021

이웃 마을

굽은 길



남편 생일이 다가왔다. 특별히 올 사람도 없는 둘만의 단출한 식사인데, 그래도 전날에는 뭘 만들어야 하나 고민한다. 갱년기를 지나도 한참 지난 남자가 자꾸 우울해한다. 퇴직할 날짜가 다가와서 그런지 모른다.


-애들이 내 생일 기억할까?

-그럼. 알고 있지.

한 번씩 이렇게 다독거려 줘야 한다.

잊히는 게 두려운 걸까?


미역국을 또 먹어야 하나? 슬며시 떠봤더니, 간단하게… 국이나 먹자 한다. 남편은 국이 제일 간단한 음식인 줄 안다. 그러니 어제까지 먹었던 미역국을 다시 끓여야 한다. 같은 음식을 반복해 만드는 건 지루한 일이다.

집에서 삼십 분 거리의 도시에 아들이 직장을 다니고 있다. 저녁 먹으러 올려나 전화해 봤더니, 다니던 직장이 며칠 전 폐업했다 한다. 시름시름하더니 결국 문을 닫았다. 서울로 직장을 옮기게 되어 짐 정리 중이던 아들이 저녁을 먹으러 오기로 했다. 둘이서 먹는 것과 셋이 먹는 식사는 다르다. 게다가 아들이 함께라니.

돌연 의욕이 쏟는다. 기운이 난다. 뭘 만들까? 밥, 국, 생선, 전, 나물, 갈비, 잡채. 해마다 맞는 생일상이니 특별할 게 없다. 하지만 왠지 내키지 않는다. 갑자기 초밥이 떠올랐다.


생선회를 뜨는 건 번거로우니, 연어와 쇠고기를 메인으로 하고, 아보카도, 달걀, 묵은지, 유부를 쓰자. 미역국은 제주도 방식으로 멸치 육수에 된장 풀고 미역과 채 썬 무를 넣어 끓이면 일식집 스타일의 시원한 미역국이 되겠지. 화이트 와인이 있으면 좋겠다.

와인 한 병 사 올래? 아들에게 말하려다 접는다. 정신없는 시기이니 아들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초밥이라고 꼭 와인을 곁들여야 하나. 사실 와인보다 맥주를 더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생일 선물을 사러 갔다. 지인인 가게 주인이 온라인 가격의 두 배를 불렀다. 달라는 대로 주고 산다. 주인이 비싸게 불렀다 여기지 않는다. 상가 세를 내야 하니, 온라인 가격과 비교할 수 없다. 물건 가격을 깎는 데 성공해본 적이 없고 그렇게 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돌아서면 손해 본 듯한 느낌이 들지만, 이제는 싸게 사는 능력이 내게 아예 없다는 걸 인정한다. 가격 표식을 어떻게 할까요? 묻는 지인에게 떼 달라고 말한다. 남편은 비싼 물건을 사는 걸 싫어하고, 나는 가끔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리 준비해 놓았지만, 남편과 아들이 도착할 시간에 맞추려 했더니 분주해졌다. 초밥을 섞어서 접시에 골고루 예쁘게 담는다는 계획은 어느새 사라졌다.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선물로 산 벨트를 내놓았더니, 남편은 고맙다는 말 대신 비싸게 샀다고 투덜댄다. 온라인으로 사면 훨씬 가격이 싸다고 말한다.


-그 집 아이가 벌써 고등학생이래.

비싸다는 불평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남편은 그 가게를 안다. 주인의 내력도.


아들은 벨트를 갖고 아옹다옹하는 우리를 지켜보며 말없이 밥만 먹는다. 약간 분위기가 어색하다. 아빠 선물을 준비하지 않은 걸까? 아들에게 물어보려다 만다. 얼굴을 보여준 게 선물이지. 설거지도 해줄 거고. 미처 선물을 준비 못해서 아들은 면구한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서야 아들이 당황스러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맥주를 꺼낼 때 아들은 이전에 자기가 보낸 곡주가 어디 있을 텐데, 찬장을 열어보고 허둥댔다.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우리는 녀석이 올 때마다 갖다 준 곡주를 저녁마다 슬금슬금 예전에 이미 모두 마셔버렸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전날 오후에 아들이 돈을 보낸 사실을 알았다. 돈을 보냈으면 말을 해야지, 남편이 아들이 잠든 방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들은 경기도의 작은 월세 아파트에 살림을 두고 있기에 우리는 이참에 서울 직장 근처에 작은 전세 아파트를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조금 도와주고, 모자라면 은행 대출받고.

 

-우선 다녀보고요.

서울 전세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아들은 내키지 않아 한다.

우리 생각은 다르다. 어차피 서울에 뿌리를 내릴거면 무리해서라도 작은 집을 얻어 키워나가야 할 것 같다.  


-은행 대출을 받아 전셋집을 얻고 거기에 모은 돈을 보태고 다시 대출받고 그렇게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의 바운더리를 넓혀가는 거야. 그러다 보면 집을 갖게 되겠지. 물론 대출금 낀 상태로.


-월급으로 집은 영원히 못 살 것 같은데요. 계산이 안 나와요. 월급은 반으로 줄고, 일은 세 배 많아지고.

아들이 허허 웃었다.


-공무원이 집을 못 살 것 같지. 월급 계산해 보면. 그런데 다들 집을 갖게 돼. 그게 신비야.


-요즈음 친구들 만나면 다들 이런 말만 해요.

‘대출금 갚아야 해. 얼른 돈 벌어서.’

아들이 졸아든 목소리로 어깨를 숙인 채 친구들 흉내를 냈다.

 

-그간 모은 돈 모두 털어 넣고 은행에서 대출받고 하면 전셋집을 얻을 수 있겠죠. 하지만 계속 빚을 안고 가는 삶을 살면 결국 삶의 방향이 돈을 많이 벌어 빚을 갚아가는 쪽으로 살게 되잖아요.  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제 삶의 방향을 돈 많이 버는 쪽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은 잠시 후 우리 표정을 보더니 한 걸음 물러섰다.

-좀 지내보고 천천히 결정할게요.


초밥을 만들 생각이 떠올랐을 때 나는 신이 났다. 새로운 방식의 요리였으니까. 하지만 다음에 초밥을 만들 일은 없을 것 같다. 당일 도착한 아보카도는 익지 않아서 사용하지 못했고, 달걀은 세 개밖에 없어서 동그란 모양이 되었고, 쇠고기 위에 얹은 양파는 날 것이어서 자꾸 흘러내렸다. 설거지거리는 너무 많이 나왔고, 맛도 배달 음식보다 특별하지 않았다. 내년에는 전과 같은 음식을 만들게 되리라. 하지만 색다른 음식을 만드느라 즐거웠고, 초밥 품평하는 재미로 흥겨운 저녁 식사가 되었다.


카프카의 단편 '이웃 마을' 이 떠오른다.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생이란 놀랍게도 짧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렇게 한마디로 말할 수 있겠는걸. 예를 들어 어떤 젊은이가 -우연한 사고는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행복하게 흘러가는 일상적인 삶의 시간조차 말을 타고 가는 그런 여행에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어떻게 이웃 마을로 말을 타고 나설 결심을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거의 납득하기 힘들구나."


부모인 우리의 생각도 이 노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허투루 굽은 길을 가느라 시간 보내지 말고 직선 길을 가기 바라는 마음이다. 아들의 생각은 이 젊은이와 비슷해 보인다. 그는 이웃 마을에 가고 싶어 한다. 갈팡질팡, 간 것을 후회할지 모르지만.

살아온 시간이 달라서 생기는 생각 차인지 모른다. 노인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는데.


결과가 어떻든 초밥을 떠올리고 준비하는 시간, 만드는 과정은 즐거웠다. 아들도 지금 초밥을 만들려 한다. 이웃 마을로 말을 타고 나설 결심이다. 


집은? 결혼은?

궁금하지만, 기다릴 밖에.

생일 선물은 어디 있냐고 묻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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