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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an 29. 2021

롯의 딸 1

단편 5-1


  검은 하늘, 짙은 안개. 거실 불을 끄고 베란다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고 다. 어둠이 완벽하게 나를 가려줬다. 푸르스름한 가로등 불빛이 골목을 비춘다. 비를 머금은 어둡고 눅눅한 공기가 조금 전의 망설임, 미련, 한순간의 결심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일어나, 얼른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오던 길을 돌아가렴. 그럴 수 있다면 내 영혼도 내어 줄 텐데⋯⋯.

  차가운 눈물이 뺨을 적셨다.

  잠시 후 노란 불빛이 다가왔다. 차가 섰다. 기사가 내지르는 비명소리, 골목이 부산스러워졌다. 나는 조용히 베란다 문을 닫고 집안으로 몸을 숨겼다.


  올해 일흔인 운전기사 김 씨가 밤늦은 시각 그 골목으로 들어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역에서 태운 여자는 무거운 짐을 들고 있었다. 친정 가는 길이라 했다.

  “아무래도 딸이 최고인 거 같아요.”

  김 씨는 백미러로 뒤를 보며 말을 건넸다.

  “아이고, 말도 마세요. 엄마가 건강해야죠. 혼자 지내는데 마음이 많이 쓰여요.”

  여자는 손사래를 쳤다.

  “친구들 보니까 옛날에는 아들 낳았다고 재더니 이제는 모두 남이라고, 요즈음은 나를 부러워해요.

  김 씨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골목은 좁고 어두웠다. 저만치 앞에 가로등이 푸른빛을 뿌리고 가장자리에 늘어선 차들이 사선으로 꽁지를 내밀고 있었다.

  돌아 나오기 힘들겠네, 김 씨가 중얼거렸다.

  “더 들어가야 하는데, 골목이 좁아서요. 여기 내릴까 봐요.”

  눈치 보던 여자가 주섬주섬 지갑을 꺼냈다.

  여자를 마지막 손님으로 퇴근할 생각이었던 김 씨는 마무리를 잘하고 싶었다. 까짓 거 인심 쓰자.

  “무겁지 않나요? 조금 더 들어가죠.”

  김 씨가 말하는데 차가 쿨렁하며 한쪽으로 기울었다. 골목에 턱이 있었나? 바퀴에 뭐가 걸린 거 같았다. 물컹. 뭔가 이상한 느낌.


  믿지 못할 사건이 하루가 다르게 터졌다. 우울한 날이었다. 당직실 텔레비전은 서거한 전직 대통령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자살이라니! 의사의 말에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박 형사는 일요일 근무가 싫었다. 집에서 느긋하게 쉬면서 맥주도 마시고 좋아하는 야구 경기도 실컷 봐야 하는데. 월요병이 더 도지는 것 같았다. 오늘은 제발 아무 탈 없이 넘어갔으면⋯⋯.

  뒤쪽 책상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구급차와 경찰차의 경광등 불빛이 골목 어귀를 어지럽게 했다. 골목 안은 택시와 사람들로 뒤 엉겨 있었다. “지나갑시다.” 반복해 외치며 박 형사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노란색 펜스 너머 누워있는 여자의 사체가 보였다.

  가로등 아래에서 핏자국이 점점이 골목 중앙까지 이어져 있었다. 피해자는 뒷머리가 함몰되어 있었다. 뭔가 무거운 것으로 내리친 것 같은데. 박 형사는 주위를 둘러봤다. 벽돌 한 무더기가 눈에 띄었다. 담벼락 공사에 쓰다 남은 것 같았다. 살해 도구일지 모른다. 여자의 핸드백 속에는 지갑과 책 한 권 외 아무것도 없었다. 카드와 현금이 그대로 있는 거로 봐서 단순 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지갑에서 주민증을 꺼내 불빛에 비춰 봤다. 장 효순, 41세.

  머리 희끗한 택시 기사는 덜덜 떠느라 제대로 말을 못 했다. 함께 탄 여자 승객이 그나마 침착하게 사체 발견 경위를 설명했다. 박 형사는 신원을 적어놓고 택시 기사와 승객을 돌려보냈다.

  다음날 장효순의 신상 기록이 떴다. 유족으로 딸이 하나 있었고, 남편은 이 년 전에 사망했다. 박 형사는 책상 위에 놓인 피해자의 핸드백을 다시 열어봤다. 책 이외 별다른 건 없었다. 핸드백에서 나온 책은 김진영 작가의 ‘롯의 딸’이었다. 박 형사는 책을 꺼내 쌓인 서류 위에 던져 놓았다.

  검시 결과는 박 형사의 추측과 일치했다. 두부 손상으로 인한 과다 출혈.


  며칠째 수사는 답보 상태였다. 장효순이 자기 집도 아닌 낯선 골목에서 왜 죽었는지, 볼펜으로 메모지에 물음표만 그리던 박 형사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두들겼다. 두통이 오고 있었다. 계속 담배를 피워댔더니 마침내 옆자리 최 형사가 짜증을 냈다.

  “거참, 그만 좀 나가서 피우소. 그런다고 범인이 잡히나.”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가던 박 형사가 다시 들어와 책상 위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건물 뒤편에 벤치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이 재떨이의 구겨진 담배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책을 밀어 놓고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지나가던 동료가 기웃하더니 물었다.

  “무슨 책이야?”

  “몰라, 한 번 읽어보려고.”

  박 형사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차례를 펼치니 소제목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롯의 딸’이라⋯⋯ 제목인데, 왜 맨 뒤에 넣었을까?

   김 작가의 개인사는 독신이라는 것 외 거의 알려진 게 없었다. ‘롯의 딸’은 김진영 작가의 일곱 번째 책이었다. 삼십 대 초반에 첫 시집을 출간한 그녀는 유려한 문체와 독특한 사유의 시와 수필로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소수의 마니아층을 가진 작가였다. ‘롯의 딸’은 몇 주 전부터 수필 부문 독자 구매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간 5회 연재 예정)


표지 그림 : 롯과 두 딸, 알브레히트 뒤러(1496-1498), 미국 국립미술관 내셔널 갤러리, 워싱턴 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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