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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an 30. 2021

롯의 딸 2

단편 5-2

1



 "형제들, 제발 나쁜 짓 하지 마시오. 자,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딸이 둘 있소. 그 아이들을 당신들에게 내어 줄 터이니, 당신들 좋을 대로 하시오. 다만 내 지붕 밑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니, 이들에게는 아무 짓도 말아주시오."(창세 19, 7~8)  


  회색의 각진 건물. 갈색 쪽마루가 길게 이어지는 복도. 연필로 하트와 이름이 새겨진 책상. 빳빳하게 풀 먹인 세일러복 카라. 하얀 발목 양말.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 삐그덕 거리는 책상. 후닥닥 일어나느라 의자 끄는 소리. 긴 막대기를 들고 다니며 무심코 복도 벽을 퉁퉁 치는 선생. 치르르 치르르 우는 매미.

  여름 오후,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우리는 서둘러 교실의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마르고 검은 얼굴. 물리 선생이 가르친 것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냄새.

  교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면서 그는 늘 고함부터 질렀다.

  “아이고, 냄새야. 가시나들, 창문 좀 열어라.”

  짜증스러운 말투와 경멸하는 표정을 나는 볼이 붉게 달아올랐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십 대의 막바지였다. 교실은 육십 명의 여학생으로 빼꼭했다. 냄새란 게 묘해서 계속 맡다 보면 둔감해지는 법이라 선생이 말하기 전에 우리는 그 냄새를 맡지 못했다. 고개를 푹 꺾어 책상에 얼굴을 묻었던 건, 물끄러미 책을 보는 척했던 건, 목덜미까지 타고 내려온 수치심 때문이었다.

  냄새에 유달리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몇 년 전 유방 외과에서 시술을 받았다. 염증이 생겨서 유두 가장자리가 짓물렀다. 진찰 후 의사는 간단하게 바로 처치를 하자고 했다. 메스를 갖다 대자, 상처에서 고름이 흘러나왔다. 의사는 간호사에게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창문을 열라고 말했다. 그 병원에 다시 가지 않았다.


  국사 선생은 책의 삼 분의 일을 펼치라 하더니 다음 시간까지 모두 외워 오라고 했다. 첫날 그가 가르친 건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세 갈래 길이었다. 신의주 방면,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 오른쪽으로 내려오는 길, 뭐 그런 거.

  다음 시간 그는 출석 번호 일 번을 불러 세웠다. 선생의 질문에 일 번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음. 다음. 다음. 번호는 일사천리로 넘어갔다. 아이들은 계속 서 있었다. 열 명 정도 지났을 때 한 아이가 용케 기억했다. 답한 아이는 자리에 앉고 두 번째 질문이 다음 번호에 떨어졌다. 서너 번 질문으로 수업을 마쳤다. 한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 서 있었다. 선생은 교실의 네 모서리를 막대기로 가리켰다. 검은 치맛자락이 몽둥이에 풀썩 대면서 교실이 희뿌옇게 흐려졌다. 가르친 것, 배운 것 없는데 국사 시험은 반 전체가 늘 만점이었다.

  음악 선생이 이상한 사진을 본다는 소문이 돌았다. 친구와 함께 몰래 음악실에 들어갔다. 사진이 있을 만한 곳은 피아노 위에 얹혀있는 책 밖에 없었다. 친구가 망보는 사이 책을 훑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게 주르륵 펼쳐졌다. 붉은 벨벳 위에 누워 있는 여자의 나신은 너무 희어서 현실감이 없었다.

  좀 더 진도를 나가보자.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한문 선생, 그리고 효선이.


  책의 평은 특이했다. 수필집은 대체로 감사, 위로, 일상의 소중함 같은 게 나오는 법인데 이 책은 진실, 고백, 불편한 마음같이 어둡고 묵직한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인터넷에는 작가의 모교가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본인이 겪은 일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한문 시간에는 자습이 잦았다. 수업 시간에 선생은 늘 교실 뒤로 갔다. 조용한 교실에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작은 부스럭거림 같은 무엇. 손이 오가고 뭔가 투덕대는 느낌. 그리고 점차 소리는 잦아들었다. 처음 몇 번은 이상해서 뒤를 돌아봤다. 한 번 그 광경을 목격한 우리는 두 번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효선은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공부를 잘하거나 명랑하거나 예쁘지 않았다. 못생겼거나, 말썽꾸러기 거나, 소위 잘 나가는 애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극히 평범했다. 무리 속에 섞여 있으면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아이였다. 그녀는 말랐고 안색은 창백했다. 피부는 노르스름해 생기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떻게 보면 또래보다 나이 들어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키가 커서 교실의 맨 뒷줄에 앉았다.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선생이 교실 뒤로 가는 이유를.

  개자식, 지금 나한테 뭐 하는 거야? 효선이 선생을 노려봤다. 벌떡 일어나서 교실을 나갔다. 노트에 낙서하며 나는 효선이 고함치는 장면을 상상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침묵 속에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만 들렸다.

  우리가 그녀를 따돌린 건 부당한 일이었다. 그런데 다들 그랬다. 노랗게 말라가는 효선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한문 선생이 떠올랐다. 그러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졸업 후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같은 대학에 입학해 교정에서 한두 번 얼굴을 마주치는 아이들 외에는 대부분 소식이 끊겼다. 나도, 효선이도, 국사 선생에게 엉덩이를 두들겨 맞던 애들도 모두 세상으로 나갔다.

  기억을 지우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떤 기억은 마치 엊그제 일처럼 끊임없이 되살아났다. 손님 대신 딸을 내어주고 애첩을 내어주던 구약 시대. 롯이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을 위해 딸을 내어주듯, 세상은 변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주간 5회 연재 예정)


표지 그림 : 롯과 두 딸, 알브레히트 뒤러(1496-1498), 미국 국립미술관 내셔널 갤러리, 워싱턴 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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