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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25. 2020

여행, 스쳐갔지만 아쉽진 않아

후회하지 않는 여행이란 게 있을까?


프랑스 조각가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Phalle)'의 작품을 소개하는 글을 읽었을 때 나는 그녀가 만든 '스트라빈스키 공원'에 시선이 꽂혔다. 스트라빈스키 공원? 우리가 북유럽 여행할 때 사진 찍었던 그곳 아닐까? 금속 파이프가 나란히 꽂혀있던 곳. 산책하던 검정개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곳. 벤치에서 우린 마지막 사진을 찍었지.


이렇게 기억하는 것도 그나마 사진 덕분이란 건 이미 눈치챘으리라.

오래전에 사라졌을 기억을 사진이 현재로 되살려줬다. 


나의 예상과 달리 스트라빈스키 공원은 퐁피두 박물관 앞 어디에 우물이라도 있을 분위기의 적당히 나무로 둘러싸인 공원이었다. 아, 그곳엔 우물이 아니라 니키가 만든 분수가 있다고 했다. 


물론 나는 거기를 지나갔다. 지도를 들고 거리를 헤매다 퐁피두 박물관의 굴뚝(박물관의 외관이 그렇다는 말이다)을 발견했기에 그 앞의 광장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박물관 앞 광장에 젊은이들이 많이 앉아 있던 기억은 난다. 


"그걸 알아보지 못했다니… 기가 막히는군!"을 유흥준 교수는『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이렇게 우아한 말로 표현했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되나니, 그때 보이는 건 이미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


그렇게 모르고 지나간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그나마 위안으로 삼는 건 후일에라도 그곳에서 내가 뭘 놓치고 지나갔는지를 알게 되는 거다. 스트라빈스키 공원처럼. 




아일랜드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교 교정에서 친구들과 나는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가 제안했는지 갑자기 공중 뛰기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거다. 사진은 어떻게 나왔냐고? 웃기게 나왔다. 하지만 그곳의 하늘과 숲, 학교 건물과 우리의 웃음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갑자기 웬 트리니티 대학교?


이승우 작가의 소설을 읽었는데 거기에 트리니티 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채색 필사 성경이 나온 거다. 이 작가의 문장은 대체로 쉽게 읽히지 않는다. 오른쪽 왼쪽으로 쓰고 뒤집어 엎치고 눕혀서 문단을 이룬 것 같아 여간 문장 읽기의 즐거움에 빠진 사람 아니고선 읽다가 한숨을 쉬게 된다. 그런데 『지상의 노래』(민음사, 2012년)는 읽을만했다. 은근히 흥미로워 미로의 출구를 찾아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거기에 갑자기 트리니티 대학교가 등장한 거다. 엥? 여기? 가본 곳인데. 우리가 펄쩍펄쩍 공중제비돌기 하던 곳이잖아. 




트리니티 대학교



아일랜드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 '켈스의 서'가 있는 도서관 앞에서 우리는 사진만 찍고 왔다. 가이드가 슬쩍 ‘캘리그라피 체’ 이야기를 한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뿐. 아마 입장료를 따로 내야 해서 그는 우리 지갑을 축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 나는 학교 앞 안내판을 무심히 보기도 했다. 사진도 찍었으니. 





앞에서 유흥준 교수가 말하지 않았나. 알면 보인다고.


 '캘스의 서'는 천 년 전 캘트 수도승이 만든 아름다운 채색 라틴복음서로 아일랜드 최고의 보물이다. 이 '캘스의 서'를 보러 학생 수 일만 오천 명인 트리니티 대학에 매년 오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는 걸 우리는 왜 몰랐을까.



켈스의 서(사진출처:http://www.bookofkells.ie/book-of-kells/)



롱 룸 (사진출처:http://farm1.static.flickr.com/97/244063656_ab463a4666.jpg?v=0)



아쉽지만 되돌릴 수 없다. 그래도 몇 달 후 친구가 더블린으로 여행을 간다기에 꼭 보고 오라고 귀띔했다. 걔는 보고 왔을까?


여행에서 원하는 걸  모두 볼 수 있는 건 아니란 걸 안다. 때로는 생각지도 않은 걸 볼 수 있다는 것도.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성 박물관에서 ‘야곱의 돌’을 봤다. 

창세기에서 야곱이 꿈에서 천사를 봤을 때 베고 있었다는 돌이다. 대관식 의자에 설치돼 잉글랜드 왕이 즉위할 때마다 깔고 앉아 '대관식의 돌'이라 불리는 돌.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대관식이 열리지 않는 해엔 스코틀랜드에 보관한다는 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이웃나라 간의 분쟁이라니… 떠오르는 게 많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성, 야곱의 돌



돌은 베개로 쓰기엔 지나치게 컸다. 야곱은 거인이었을까? 의문은 그들의 침대에서 풀렸다. 셰익스피어 생가에서 본 침대는 생각보다 길이가 짧았다. 다소 과장이긴 하지만 키가 160센티미터가 안 되는 내가 누워도 발이 침대 밖으로 삐져나올 것 같다. 알고 보니 우리처럼 드러눕는 게 아니라 등을 기대어 거의 앉은 자세로 자는 게 그들의 습관이라나. 그러고 보면 야곱의 돌은 베개가 아니라 등받이이니, 그 크기가 이해되기도 한다. 야곱이 거인일 필요가 사라졌다. 



잉글랜드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Stratford-upon-Avon) 셰익스피어 생가의 침대



후회하지 않는 여행이란 게 있을까? 

여행에서 놓친 것, 생각밖에 보게 된 걸 떠올려 봤다.


다시 가기 힘들지만 다시 간대도 크게 달라지진 않으리라. 하지만 스치는 말에 옛 기억이 떠올라 사진 속에서나마 그곳을 찾게 됐다. 그렇게 알게 된 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놓쳐서 아쉽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 게 여행이다.' 산문집의 서문으로 괜찮지 않을까? 후일 쓸지 안 쓸지 모르지만. 제목으론 이게 좋겠다. '여행, 스쳐갔지만 아쉽진 않아'


아쉬워서 하는 말이라는 건 다들 아시겠지?




#지상의 노래  

#트리니티 대학교

#캘스의 서  

#야곱의 돌 

#셰익스피어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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