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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Feb 17. 2021

다시 폿돌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어머니를 기억하며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인다. 식당 뒤 켠 처마 밑 그늘진 곳에 있는 거무스름한 돌 하나. 무릎 높이의 키에 절구보다 얕은 파임. 우툴두툴한 재질. 어디에 쓰이는 물건일까. 큰 손바닥 두 개를 나란히 오므려 펼친 모양새가 무엇을 담을 수도 흘릴 수도 있겠다. 아련한 기억이 뒤를 돌아보게 한다. 늘 한자리에 있어 뜨거운 볕에 익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았다.

   대전에서 한 시간 거리 나지막한 산 아래 자리 잡은 식당, 돌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광장이 나온다. 송홧가루 쏟아질 듯 가지 널브러진 소나무가 정자 위에서 나를 굽어본다. 예전에 들렀던 곳이다. 그때는 넓었는데 이제는 좁다. 기억을 되살리느라 주변을 둘러본다. 시간이 지나면 같은 공간도 달리 보이는 걸까.

   비빔밥을 주문했다. 잘 볶은 나물이 분이 올라 뽀얗다. 곱게 간 들깨 국물 탓인지 부드럽고 고소하다. 안내하는 여자가 갈비 한 접시를 곁들여 시키라고 권한다. 적당히 양념되어 살짝 익힌 분홍빛 갈비가 앞에 놓이자 친구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젓가락이 분주해진다.

   식당 뒤뜰에 유난히 돌이 많다. 어디서 왔을까 이 많은 돌은. 열심히 녹두 물을 흘렸을 맷돌, 잘 익은 찹쌀의 찰기를 돋우던 절구, 진흙 신발 받쳐주던 디딤돌, 홑청을 펴느라 두들겨대는 매타작을 꿋꿋이 견딘 다듬잇돌. 크고 작고 높고 낮은 돌이 한가득 쌓인 가운데 돌확이 있다.


   조리 도구가 좋으면 요리가 쉽고 음식 맛도 좋다. 김치 한 번 담그려면 큰 양푼 작은 양푼이 부엌의 싱크대를 모두 점령하는 게 아파트 살림이다. 물이 튀고 개수대에 얹은 양푼이 삐꺽거리면 채소 펼쳐놓고 다듬고 마음껏 물 뿌려도 되는 널찍한 우물가가 절로 그립다. 

  얼갈이와 열무를 소금에 절이고 텃밭에서 따온 붉은 물고추, 마늘, 새우젓을 돌확에 넣어 주먹만 한 폿돌로 확확 문지르면 갈린 듯 안 갈린 듯 붉은 양념이 잘박해진다. 씻어 건진 배추를 돌확에 올려 아래위 몇 번 뒤적인다. 시원한 우물물 한 바가지 부으면 물김치, 그냥 두면 채소에서 빠져나온 물기로 간간하고 짭짤한 풋김치가 된다. 고추장 한 숟갈 얹어 비빔밥으로 먹기도 하고, 삶은 국수 위에 얹어 열무국수로 먹기도 한다. 돌의 찬 기운이 은근히 밴 김치는 뜨거운 여름에 어울리는 시원한 반찬이다. 

 
   물김치 담그기가 늘 어려웠다. 잘 담그려 할수록 실패했다. 재료를 많이 넣거나 너무 주물렀다. 싱겁거나 짜거나 너무 숨이 죽었다. 


  “그게 뭐가 어렵니. 제일 쉬운 게 물김치인데. 사람 손이 덜 갈수록 여름 김치는 맛있는 법이야.”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시집간 딸들은 결혼한 첫해부터 김장을 하고 장을 담갔다. 음식을 맛보고, 만드는 것을 본 기억이 우리의 요리 선생이었다. 잘 익은 된장의 황금빛에 탄성을 질렀고, 독 가장자리의 벌레에 난감해했다. 철철이 장아찌와 마른반찬을 보내주는 살가운 엄마가 부러웠다. 하지만 엄마가 야속하지는 않았다.
   가끔 생각했다. 아버지가 맏이가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많은 제사와 명절을 우리 집에서 치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좀 더 오붓하게 도타운 정을 나누었을지 모른다고.

   욕실 바닥에 머리카락이 엉기고 바지랑대 길게 이은 빨랫줄에 하얀 천이 나란히 널리자 엄마는 혼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수시로 동네 아주머니가 들락거렸다. 곗돈이 오갔다. 돈이 생길 때마다 어디선가 물건 파는 아주머니들이 오기 시작했다. 컵, 밥그릇, 냄비, 전기 제품 같은 것들. 엄마는 차곡차곡 산 것들을 다락에 올려놓았다. 다락이 찰 무렵 큰 언니가 시집갔다. 다락에서 쏟아져 나온 박스를 열어 보고 구경하는 게 신났다. 다락은 휑하니 비었다. 엄마는 다시 빈 다락에 물건을 채우기 시작했다. 다락이 찰 무렵, 둘째 언니가 시집갔다. 그렇게 엄마는 세 딸을 시집보냈다. 채우면 비우고 채우면 비우면서. 다락에 든 것 중 엄마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돌확은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다. 물을 부으면 보듬어 안고, 손으로 훑으면 미련 없이 흘려보낸다. 확질한 보리를, 잘 갈린 콩물을, 얼갈이 양념을 남김없이 쓸어 보내고 쏟아붓는 물 한 바가지에 모든 흔적을 지운다. 기다림을 품은 채 고요한 우물 옆 돌확처럼 엄마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우리 곁을 지켰다.

   돌확은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다. 잠자고 있는지 모른다. 작은 새 한 마리 괸 빗물 마시고, 수면을 뛰어다니는 장구벌레 한 마리 너울을 만든다. 누워 있는 엄마가 처마 밑 그늘진 곳에 옮겨놓은 돌확 같다. 다시 폿돌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갑자기 후드득 비가 내린다. 염천에 갈라진 흙이 반갑게 물을 빨아들인다. 빗물에 젖은 갈색 나뭇잎이 아연 생기를 되찾는다. 


  햇볕에 말라 하얗게 바랜 우물 옆 돌확에도 빗물이 떨어지겠지. 괸 빗물 손으로 쓸어내고 큼직한 솔로 쓱쓱 문질러 푸른 이끼 벗겨내면 잠자는 돌확은 기지개를 켤까. 시원한 물 한 바가지 끼얹어 잠자던 돌확이 깨어나면 엄마도 다시 일어나 걸어 다닐까.

<수필과 비평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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