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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Feb 26. 2021

하루 만에 접은 도시락 만들기

함께 식사하러 갑시다



집에만 있으니 식료품 사는 것 외에  돈 쓸 일이 없다. 미장원도 안 가고, 목욕도 못 간다. 친구들과 만나지 않으니 외식할 일, 여행하려고 돈 모을 일, 돌아다니지 않으니 자동차를 바꿀 일도 없다. 지갑이 두두룩해진다. 힘든 사람 많은 상황에서 이런 말 하는 게 미안하지만, 이렇게 살면 남편 퇴직 후 수입이 줄어도 크게 걱정할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밤에 쇼핑하는 습관이 생겼다.

맨 처음 산 건 그릇이었다. 매일 집밥을 먹으니, 그릇이라도 변화를 주고 싶었다. 가구며 인테리어, 부엌살림 바꾸는 게 코로나 시대의 소비 패턴이라더니, 2인조 식기랑 나무젓가락을 사며 속으로 웃었다. 지난달에 친구가 최근 산 것들이라며 자질구레한 부엌살림을 카톡으로 보여 줄 때 저걸 왜 사나, 생각했는데.

다음날 밤에는 밤새 도시락통을 사려고 여기저기 웹 사이트를 들락 거렸다. 갑자기 웬 도시락통이냐고?


며칠 전 퇴근한 남편이 슬그머니 도시락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도시락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었어.

-그래요? 도시락 먹는 게 좋은가?


-글쎄. 안 그래도 각자 방에서 근무하데 점심시간마저 방에서 나오지 않으니.

-아무래도 사회성이 떨어지겠다. 그치?

-그렇지. 종일 혼자 지내니까.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자려고 누우니 잠이 저만치 달아났다. 요즘 들어 부쩍 잠드는 시간이 들쭉 날쭉해졌다. 수면 장애다. 옆으로 누었다가 바로 누웠다가, 이불을 덮었다가 걷어찼다가, 불을 켰다가 껐다가, 책이나 읽자 하며 책을 펼쳤다가 덮었다가, 엎치락뒤치락한다. 한참 그랬는데 잠은 점점 더 달아나고 갑자기 뜬금없이 도시락이 떠올랐다.


검색해볼까? 작고 예쁜 걸로. 밥그릇, 국그릇. 이런 건 식상하지. 아들이 고 3 때 쓰던 보온 도시락이 아직 창고에 있다. 두 개를 장만해 점심, 저녁 번갈아 가며 싸서 날랐는데 여직 하나가 남아있다. 한 개는 이듬해 친구 아들에게 줬다. 벌써 오래전 일이다. 이젠 그것도 버려야겠네. 쇼핑 사이트에서 도시락 통을 계속 찾아 헤맨다. 뭐가 좋을까?


핸드폰 시계가 두 시 반이 넘었다고 알려준다. 좀 있으면 현관 밖에서 신문 던지는 소리가 날 텐데. 플라스틱보다는 스텐 재질이 좋을 것 같다. 뜨거운 밥도 바로 담을 수 있게. 직사각형의 슬림한 디자인을 찾았다. 얘는 가방이 없네. 디자인은 마음에 드는데. 종이 봉지에 담기보다는 도시락 가방이 있으면 좋은데. 가방을 찾아서 나는 다른 사이트로 원정 간다. 녹색 가방을 찾았다. 클릭, 결재한다. 여기에는 파란색 세라믹 도시락 통이 있다. 예쁘네. 용도를 생각하며 사이즈 별로 그린 하나, 핑크 하나를 지른다.


이젠 도시락 요리를 검색해보자. 유부초밥, 메쉬드 포테이토, 과일이랑 치즈. 요구르트도 한 병씩 넣어주면 좋겠지. 그럼 치즈와 요구르트를 사야겠네. 식료품  쇼핑 사이트로 건너간다.




평소와 달리 아침 일찍 부엌에서 얼쩡거렸더니, 남편이 뭐하냐고 묻는다.

-도시락 싸 주려고.


-뭐, 도시락? 야... 야... 필요 없어.

남편이 손사래를 친다.


-간단하게 넣어 줄게.

-웬일이니?


-퇴직할 때도 됐고.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까.

-알긴 아네.

-그러엄. 가끔 싸 줄게. 매일은 안 돼. 계속 도시락 들고 다니면 사회성 떨어져. 회사 식당도 곤란해지고.


잠시 후 남편의 콧노래 소리가 들린다.

-다들 놀라겠다. 도시락 싸 왔다고.

혼자 중얼거린다.


도시락 가방을 들고 나가더니, 잠시 후 현관문 소리가 다시 들린다.

-마스크 쓰는 것도 잊어버렸네.

황급히 들어와 마스크를 고 나간다.


다음날은 우엉밥을 하기로 했다. 저녁에 우엉, 당근을 미리 썰어 두고 아침에 밥을 짓는다.

-뭐해?

-도시락 만들지.


-또? 야 그러면 나보고 밥 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아. 사람들이 한 번은 가자고 오지만 두 번 연이으면.

-그래? 그럼 안되는데.

나는 도시락을 만들다 접는다.


-안 싸니?

-응. 당신 왕따 되면 안 되니까.

-뭐, 이미 왕따인데.

퇴직을 일 년 앞둔 남편은 최근 들어 연구소의 큰 프로젝트를 맡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여자들도 도시락을 싸 다니나 보다. 두 명인데 통 얼굴이 안보이거든.

외부 상황에 무심한 사람이 이제야  변화를 눈치챈다.


그러면 안되는데. 발전이 없어. 밥 먹으러 같이 식당으로 걸어가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해야지. 예전엔 운동도 하고 해서 -십여 년 전, 연구소에서는 점심시간마다 축구를 했다. 축구 때문에 연구소를 다닌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 얼굴 보는데 이젠 얼굴 볼 일이 점심때 밖엔 없거든. 한 번 이야기해 줘야겠다. 그런데 요즘 애들은 우리랑 생각이 달라서…

남편이 혼잣말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조너선 솔크 생물학 연구소는 암과 알츠하이머, 유전병 등을 연구한다. 이곳의 건물은 층고가 넓고 연구실 사이에 벽과 문이 없다. 이는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연구실을 벗어나 다른 연구자와 협력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많은 협업이 일어난다. 크지 않은 연구소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나온 이유로 보인다.


앤서니 홉킨스, 엠마 톰슨이 출연한 영화 『남아있는 나날』에서 집사 스티븐슨은 총무 켄턴 양과 잦은  마찰이 생기자 저녁마다 15분간 코코아 타임을 갖기로 한다. 스물여덟 명이나 되는 하인들이 200년 넘은 고택을 관리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건 현대의 호텔 운영 체제와 비슷해 보인다. 차를 마시며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로 하루의 일과를 돌아보며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한다. 코코아 타임을 가진 이후부터 둘 사이에 긴장이 사라진다. 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한다.


나는 하루 만에 남편 도시락 만들기를 접어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사무실에 혼자 박혀있기보다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바라는 의미로. 알록달록한 세라믹 도시락통은 오지도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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