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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Feb 26. 2021

『남아있는 나날』

품위란 무엇인가?


『남아있는 나날 The Remains of the Day』은 앤소니 홉킨스, 엠마 톰슨 주연의 영화 '남아있는 나날'의 원작이다. 영화를 본 기억이 남아있어서 책 읽기가 망설여졌다. 영화가 책의 좋은 인상을 바라게 하기도 하고, 책이 영화의 좋은 분위기를 덮기도 한다. 그런데 책 표지를 보니 저자가 일본인이다. 일본인이 쓴 영국 소설이라…. 이게 가능할까?


가즈오 이시구로는 해양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다섯 살 때 영국으로 이주했다. 대학에서 철학과 문예 창작을 공부했다. 1982년 일본을 배경으로 한 첫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을 발표했고, 2017년 작품에 담긴 '위대한 정서적 힘'을 높이 평가받아, 프란츠 카프카와 제인 오스틴을 섞어 놓은 작가라는 평과 함께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처음에는 읽기가 좀 힘들었다. 우리말이면 단순한 긍정일 문장이 영어는 긍정과 부정 그리고 긍정으로 돌아온다. 천천히 읽어야 의미가 제대로 전달된다.


게다가 200년 된 영국 고택, 달링턴 홀에서 30년 근무한 노 집사의 언어는 표현이 직접적이지 않고 완곡하다. 저자는 그를 통해 품위란 무엇인가, 자신의 지위에 상응하는 품위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준다.




스티븐슨은 본질에 충실했던 자기의 부친이야 말로 '품위'의 화신이었다고 굳게 확신한다. 부친에겐 객관적으로 보아 통상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몇 가지 속성이 결여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상적이고 장식적인, 케이크에 입혀진 당의처럼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한 본질이라고는 할 수 없는 속성들, 이를테면 훌륭한 악센트와 언어 구사력, … 폭넓은 일반교양 같은 것 말이다. 이런 것은 내 부친께서 단 하나도 자랑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 내가 볼 때 우리 세대는 '깔끔하게 다듬는 것'에 지나치게 몰두해 왔다.' p47


인도의 어느 집사는 식탁 아래에서 호랑이를 발견한다.
조용히 식당의 문을 닫은 그는 손님과 환담하고 있는 주인에게 다가가 조용히 귓속말을 한다.

-나리, 식탁 아래에 호랑이가 있습니다. 총을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몇 분 후 주인과 손님들은 총성 세 방을 듣는다.

잠시 후 응접실에 들어선 집사가 말한다.
-식사는 평소와 같은 시각에 제공될 것입니다. 방금 일어난 사건의 흔적은 일절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읽으면서 차츰 깨달았다.


번역투의 문장이라는 의미는 번역자가 가능하면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려고 노력했다는 뜻이라는 걸.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의 경우에는 의역이 훨씬 좋아 보인다. '낮의 나머지'보다는 '남아있는 나날'. 얼마나 멋진 우리말인가.

작가는 이 책의 제목, The Remains of the Day를 프로이트의 '낮의 잔재'에서 가져왔다 한다.


글쓰기를 처음 공부할 때 지도 선생님은 내 글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문장이 독특하다고 했다. 얼마 후에는 칭찬인지 나무람인지, 번역투 문장 같다고 말했다. 국내 소설보다 국외 소설을 즐겨 읽어서 그런지 모른다.



#남아있는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송은경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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