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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r 09. 2021

하대

묘한 낮춤말


동네 양말가게 사장은 삼십 대 후반 정도의 청년이다. 실제 결혼을 했는지 모르지만 말이 경쾌하고 행동이 가벼워 어쩐지 결혼 안 한 것처럼 보인다.


여러 가지 양말을 잘 갖춰 놓아서 계절이 바뀌어 밝은 빛깔의 얇은 양말이 신고 싶거나 짙은 색 따뜻한 양말이 필요할 때면 이 가게를 찾았다. 가게는 일반 점포 두 개를 확장한 크기로 벽면부터 아래까지 온갖 양말이 알록달록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 가게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원하는 걸 말하면 청년이 얼른 골라준다는 거다. 내가 일일이 많은 양말을 헤집고 고를 필요가 없다. 쇼핑을 힘들어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그지없이 편안한 가게다.


몇 달 만에 찾아가도 청년은 어제 온 사람처럼 대한다. 그런데 얼마 전 양말을 사러 갔을 때 나는 평소와 달리 청년의 말투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주로 이렇게 말한다.


-아, 부츠 안에 신을 양말? 이게 좋아. 다들 이거 사 가. 남자 양말은 이게 좋지. 길어 보여도 빨면 줄어.


값을 지불하면서 나는 슬그머니 한 소리 했다.

-근데 말을 너무 놓는다.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보이지 않는 찬바람이 둘 사이를 휘익 스쳐갔다.


말 많은 청년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당황한 것 같아서 나도 허둥지둥 자리를 뜨고 말았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는다는데. 쓸데없는 말 한마디로 친밀감 오가던 사이를 차갑고 냉랭하게 바꾸었고 덤으로 받던 양말 한 켤레도 안타깝게 사라져 버렸다.


하대, 낮춤말에 관해 생각하게 된 건 친구가 페북에 하대를 당해 기분 나빴던 일을 써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이 동안이다. 페북 프로필 캐리커쳐는 더 어려 보인다. 마치 이십 대 같다. 실제로 그는 오십 대 후반이다.

그는 외모 때문에 가끔 하대를 받는다면서 전화 목소리와 프로필 캐릭터만 보고 만나는 이들이 자신보다 어리다고 생각해 말을 낮추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이런 이유로 마음 상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출판사의 편집자인 R 씨는 그 계통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통한다. 삼십 대 후반인 그는 주로 작가들을 많이 상대하는데 철칙 중 하나가  그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 거라고 한다. 친분이 두터운 작가들이 말을 놓으라 해도 놓지 않는 이유는 자기가 그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작가들을 대우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사투리를 많이 쓴다. 삼사십 대에는 제법 감췄다 여겼는데 -남들은 웃었지만 나는 그리 믿었다. - 나이가 드니 고향 친구들을 만나거나, 좀 편안하다 싶은 자리에선 사투리가 절로 나왔다. 고향에 가서 오래전에 잊어버린 사투리를 들으면 너무 웃기고 재미있어서 어디 적어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사라져 가는 말들이 아쉽다. 그런데 정겨운 이 사투리가 고약한 게 존대 말보다 반말이 하기 쉽다는 거다. 여기엔 수평적인 말들이 없다. 어쩌면 우리말 자체가 그런지 모르지만.


결혼 후 이곳으로 온 후 몇 번 불쾌한 표정들을 마주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친밀하다는 생각으로 허물없이 하대를 쓰는데 상대는 무시당한다고 여겼다. 왜 반말 쓰냐는 말에  무안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하대를 일종의 수평적인 말, 친화력이라 착각했던 것 같다. 존대 말을 쓰는 게 나는 무척 노력해야 하는 일이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반말을 억제하려면 아예 입을 꼭 다물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지금도 나를 ‘씨’ 자를 붙여 부르며 말끝마다 ‘이랬어요, 저랬어요.’ 할 때 나는 얘랑 언제 가까워지나 싶은 생각이 든다. 서로 말을 트고 싶은데. 상대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아닐까.


페북의 친구가 하대를 쓰지 않는 것은 나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존중하는 마음이 몸에 밴 좋은 습관이다. 그는 자기 아이 또래 대학생들에게도 절대로 하대를 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이 본인의 지위나 나이로 사람들을 하대하는지 의문스럽게 여긴다.

출판사의 편집자가 작가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작가들이 독자와 세상 사람들에게 존중받기 바라는 배려이다. 그러니 허물없이 대하고 싶은 작가도 그를 존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양말가게 청년의 하대가 듣기 싫은 건 이들과 달랐다. 그날따라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욱해서 청년을 나무랐다. 이전에는 하대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날은 왜 달라졌을까? 어느새 나이를 먹어서 청년에게 무시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위축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날 양말을 사고 돌아서 나오며 나는 괜히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대하지 못한 게 옹졸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 주고받은 말들을 떠올려 보니 청년이 그렇게 습관적으로 하대를 하더라도 내가 존대 말을 썼더라면 저 출판사의 편집자와 작가처럼 청년도 자연스레 느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대'라는 게 묘한 것이다.

어떨 때는 듣기 불편하고 어떨 때는 반갑다. 시어머니를 이름으로 부르라 하는 미국처럼은 아니더라도, 이따금 지나가다 누가 나를 반말로 부르면 반갑다. 둘 사이 거리가 확 좁혀지는 느낌이 든다.


요즘도 가끔 나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반가우면 성도 떼 버리고 이름을 부른다. 곁에 있던 이가 엄청 반가운가 보네, 참 정겹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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