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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r 06. 2021

대파를 심으며

미스 킴 라일락


이사 올 때 아예 마음을 접고 화초를 모두 없애버렸다. 나처럼 식물을 못 키우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아파트 정원의 나무와 꽃을 모두 내 것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랬더니 계절이 알아서 햇빛이랑 빗물로 사시사철 초록 순, 예쁜 꽃봉오리, 피기 시작한 꽃, 흐드러졌다 사라지는 풍경, 같은 것들을 선물해 줬다.


어느 순간부터 못하는 것들은 억지로 하려 들지 않고 접는다. 쿠폰 열심히 모아 잘 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쿠폰 모아 쓰려고 하면 이상하게 이미 날짜기 지났거나 가게가 사라졌거나 해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집에서 화초를 키울 때 어쩌다 생각날 때는 물을 너무 줘서 화분 주위에 흙이나 물이 흘러넘쳤고, 대부분 잊어버려서 화초들이 비들 비들 말라 버렸다. 손만 대면 죽어가는 화초도 살리는 금손 친구가 부럽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어제 초대받아간 친구 집에서 오랜만에 예쁜 화초들을 봤다. 베란다에 미스 킴 라일락이 있었다. 정원에서만 봤지 화분에 심긴 라일락을 처음이다. 게다가 미스 킴 라일락이라니. 한국 토종 아니랄까 봐 줄기가 오묘하게 고불고불하다. 마치 한옥 옆에 서 있는 소나무처럼.


말라서 죽은 줄 알았던 화분에 어느 날 새순이 돋아서 저렇게 자랐다며 친구는 신기해했다. 지난가을 그녀는 힘든 일을 겪었다. 베란다에 앉아서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을까, 되씹을 때 라일락 화분이 눈에 들어왔는지 모른다. 자잘한 꽃봉오리가 머지않아 피어 보랏빛 향기를 풍길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외출했다 들어오며 난전에 들렀더니 아주머니가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채소를 내려놓던 아저씨가 뭐 필요한 거 있냐고 내게 물었다.


냉동실에서 효자노릇 하던 대파 봉지를 어제 모두 비웠다. 지난여름 대파가 흔해서 밭을 갈아엎을 때 길가에서 삼천 원을 주고 무거워서 땅에 끌면서 단지마다 쉬어가며 들고 온 대파다. 대파는 그 자체로 요리를 하지는 않는데 없으면 허전하다. 그야말로 양념이다.


특이하게 중국 사람들은 원수와 화해할 때 대파를 보낸다 한다. 대파를 받으면 어떤 원한도 용서해준다. 모택동이 스탈린을 만나러 갈 때 대파를 트럭에 싣고 갔다나. 아이러니하게 요즈음은 집에만 있으니 대파 보낼 사람도 없다. 평화로워 좋지만 무료하다.


ㅡ대파 2천 원이랑 무 3천 원, 합해서  5천 원어치요.

ㅡ요즘 비싸서 3천 원 받아야 하는데….

말만 그리할 뿐 아저씨는 시원스레 대파를 집어 봉지에 담는다.


만원을 주니 거스름돈이 모자라는지 천 원짜리를 세어보다가 얼른 자동차로 달려가서 동전을 가져온다.

ㅡ동전 괜찮으세요?

ㅡ네, 괜찮아요.


받고 보니 이제는 정말 동전 쓸 일이 없다.

ㅡ이거 대파로 가져갈까요?


동전을 내미니 아저씨가 흔쾌히 다시 대파를 봉지에 넣어준다.


내가 보기에 이번 대파는 절대로 천 원어치가 아니었다. 이 천 원어치는 실히 됐다.


무는 싱크대에 던져두고 (무에 바람 들기 전 장아찌 담으라고 친구가 조언해줬다) 슬그머니 베란다로 나가 마른 흙 담겨있는 작은 화분을 끌어다가 긁적긁적 흙을 들쑤셔 새파랗고 하얀 대파를 소복이 심었다. 아니, 벽에 기대어 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물을 줬더니 흙이 넘쳐 베란다 청소하게 생겼다. 결국 검은 대파 봉지로 화분의 흙을 가뒀다.


서너 번 잘라먹을 수 있으려나.

‘파테크(파로 하는 재테크)’를 하려는 건 아닌데.


대파를 심고 바라보니 파릇파릇한 게 무척 보기 좋다.

친구네 집에 가지런히 놓인 자잘한 화초들이 눈에 어른거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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