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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r 02. 2021

그릇을 내미는 손

예기치 않게 떠오르는 생각들


  올해 초 나는 이상하게 미나리 욕심이 나서 택배로 미나리를 한 상자나 샀다. 잔뜩 먹을 심산이었다. 구워 먹고 무쳐 먹고 뿌리는 부엌 창틀에 올려놓아 초록색 줄기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신기한 게 미나리는 줄기를 조금만 남긴 채 뿌리에 물을 적셔주면 어디서든 쉬이 자랐다. 그러면 줄기를 싹둑 잘라 다시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막상 배달된 상자에서 꺼낸 미나리는 뿌리가 없었다. 상자 속에는 잘 다듬은 미나리의 싱싱한 줄기만 가득했다.  


  묵은 김치가 싫증 날 즈음이면 어머니는 한해의 첫 김치로 아가미 젓 김치를 내놓았다. 사각으로 얄팍하게 썬 무를 소금에 절이고, 억센 젓갈을 칼로 쪼아 부드럽게 다진다. 절인 무를 양념과 섞고 마지막으로 쫑쫑 썬 미나리를 넣어 버무린다.


  새해가 되자 나는 드디어 이 김치를 만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머니가 담근 김치를 더 이상 맛볼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어서다. 늘 먹고 싶었는데 왜 한 번도 만들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만들면 되지. 다음에. 다음 해에. 계속 미루기만 했다.







  

  어머니가 손짓해 부른다. 그릇에 미나리 전을 담아 내민다.

  “봄에는 꼭 미나리 전을 먹어야 해. 미나리 향기를 맡으면 봄이 온 것 같잖아.”

  미나리 전은 손으로 뜯어서 먹어야 제 격이다. 한껏 고개를 치켜들고 기다란 전을 입에 넣는다. 입 안에 가득 봄 향기가 찬다. 부엌에 서서 전을 먹다 보면 금방 배가 불러 밥 먹을 생각이 저만치 달아난다.


  “미나리는 어디서나 잘 자라. 개울이나 논, 밭 어디든 물기만 있으면 자라지. 미나리꽝은 얼마나 지저분 한지… 요즘은 아예 밭에서 키우니 덜하지만. 거머리가 있을지 모르니 잘 씻어야 한다. 그런 곳에서 이렇게 향기로운 게 자라는 게 신기해.”

  엄마는 미나리를 씻은 후 스텐 숟가락을 넣고 그릇 뚜껑을 닫아 놓았다. 나중에 열어 보면 시커먼 거머리 몇 마리가 아래에 납작하게 붙어 있곤 했다. 그걸 보면 징그러워서 부르르 소름이 끼쳤다.


  최근 들어 남편과 자주 집에서 반주로 술을 마신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면 술 생각이 절로 난다. 몇 잔 마시면 생각지 않은 것들이 떠오른다. 남편은 어릴 적 한여름 뜨거운 햇볕 아래 조밭을 맸던 일,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내고, 나는 어머니 이야기를 한다.


  술 몇 잔에 남편은 말이 많아진다.

  "잘하시는 게 많았어. 손재주가 좋아서 돌 일도 잘하고."

  낯설다. 돌 일이라니….


  “예전엔 모든 게 돌 일이 기본이었어. 돌을 잘 옮겨야 밭일도 하지. 할아버지가 우리 집 담을 동네에서 제일 잘 쌓았어. (남편의 고향은 제주다) 사람들이 구경하러 오곤 했지. 할아버지는 멍석이나 소쿠리도 잘 만들었어. 어머니는 싫어했지만. 요즘처럼 재료가 있는 게 아니어서 직접 산에서 구해야 했거든. 나무를 잘라서 손질해 일 년 이상 말려야 해. 물건을 사러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곤 했어. 할아버지는 호기심도 많아서 내가 대학 다니다 집에 오면 꼬치꼬치 바깥세상 이야기를 물으셨는데.”


  남편의 이야기를 한 쪽 귀로 들으며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얼른 잡아 꺼낸다. 나는 항상 어머니가 다른 집 어머니들과 다르다 여겼다. 친구들에게 듣는 그들의 어머니, 소설 속 어머니들은 모두 인자하고 자상했다. 우리 어머니처럼 무뚝뚝하고 잔정이 없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런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부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가시고 나니 새삼스레 하나씩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나?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스무 살 중반 직장 다닐 때 갑자기 구두를 신을 수 없을 정도로 다리가 부었다. 몸이 부실해서 그래, 혀 차던 어머니가 어느 날 불쑥 한약을 한 재 지어왔다. 가격이 칠십만 원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한 달 교사 월급이 삼십만 원이었으니 당시로는 꽤 큰돈이었다. 어머니는 마루 구석에서 약재를 말릴 때, 뒤뜰에서 한약을 달일 때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쉬쉬 했다. 어머니가 나를 부엌으로 부르더니 검은 한약을 담은 그릇을 내밀었다.

  “얼른 마셔라.”


  이상하게 요즈음 어머니의 얼굴보다 그 손이 생각난다.

 

  아침을 먹지 못하고 급히 출근하던 날, 문까지 따라 나온 어머니가 국그릇을 내밀었다.

  “옻 넣고 끓인 백숙이야. 한 모금만 마시고 가.”

  나는 그 국을 먹었던가? 입만 슬쩍 대고 먹는 둥 마는 둥 나갔을 거다.

  그릇을 내미는 손.


  첫 애를 제왕절개 수술로 낳았다. 수술 후유증으로 사흘간 열이 내리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다. 엄마가 혀를 차더니, 화난 얼굴로 말했다.

  "수술하면 쉬울 줄 알았더니 이럴 거면 그냥 낳으라 하는 건데."


  평범해 보이는 사물이 어느  순간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때가 있다. 이맘때의 미나리를 보면 나는 겨울이 막바지이고, 봄이 저만치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늘 나를 믿어줬던 어머니. 어디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를 보면 희망이 샘솟는다. 새로운 한 해가 펼쳐진다. 미나리를 보면 나는 봄, 희망, 그릇을 내밀던 어머니의 손이 떠오른다.




#미나리

#아가미젓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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