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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ug 11. 2020

영랑과 강진

영혼의 말을 주고받으며


성당에서 미사를 마칠 무렵 성가대원 중 세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베이스가 멜로디를, 소프라노와 기타 치는 이가 화음을 넣었다. 갑작스러운 노래여서 우리 성가대원들은 멜로디 음에 신경이 쓰였다. 그럴 수 밖에 처음 듣는 노래였고 근 오백 명 가까운 신자들이 듣고 있었으니까.

노래의 가사는 내 귀에 "나무로, 나무로⋯"로 들렸다.


'나무에 관한 노래구나.'

음이 좀 플랫되는 것 같아서  우리는 노래를 끝내고 자리에 돌아온  베이스를 타박했다.  

잘했다고 어깨 두들겨주는 대신 "음이 왜 그래?" 하며 놀렸다. 친한 사이일수록 칭찬에 박한 법이라.


하지만 나는 어쩐지 가락이 익숙하고 정겨워 종일 "나무로, 나무로⋯" 흥얼거리며 다녔다.

신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은근히 품격 있다며 제목을 묻는 이도 있었다.


"글쎄… 무슨 나무라 했는데."


찾아보니 노래는 '영랑과 강진'이었다. 김종률 작사 작곡, 1979년 제3회 대학 가요제 은상 입상 곡.


'남으로'를 나는 '나무로'로 들었다.


그날 신부님이 “이 노래 아시는 분?” 물었을 때 대답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대학가요제가 붐을 일으킬 때이니, 40년 전이다. 갑자기 기억을 끌어오기에는 너무 먼 시간이었다. 그런 기억은 언제나 시간이 지나서 천천히 되살아났다.


'영랑과 강진'은 봄볕처럼 따뜻했다.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자
그곳 모란이 활짝 핀 곳에
영랑이 숨 쉬고 있네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자
그곳 백제의 향기 서린 곳
영랑이 살았던 강진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란 시로 널리 알려진 영랑 김윤식의 고향은 강진이다.

강진은 동백과 모란이 넌출 하게 피고, 바다와 갯벌을 끼고 있어서 하늘을 나는 새의 울음도 기름지다는 풍요로운 곳이다. 예부터 한양에서 유배 온 선비들의 입맛을 맞추느라 음식문화가 발달한 곳, 다산이 17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수많은 저작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영랑은 시 ‘동백 잎에 빛나는 마음’에서 고향을 이렇게 노래했다.


마음이 도른 도른 숨어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시인에게 고향은 어떤 곳일까?


영랑에게 강진이 있듯이 많은 시인들이 바다를 바라보는 항구 도시 통영에서 영감을 얻었다. 청마 유치환, 박경리, 전혁림, 김춘수, 백석. 산과 바다. 막힌 곳 없이 펼쳐진 자연이 그들의 예술혼을 자극했는지 모른다.




소아마비 백신을 계발하려 애쓰던 피츠버그 대학의 조너스 솔크 박사는 아시시의 한 수도원 성당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었다. 백신을 만들어 무료로 공급한 그에게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1960년 솔크 생물학 연구소를 지어줬다. 솔크 연구소는 건물이 독특하다. 연구실 천장이 일반 건물보다 훨씬 높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루이스 칸에게 솔크는 건물의 천장을 아시시의 성당처럼 높여 줄 것을 부탁했다.

솔크 연구소의 중정은 하늘과 태평양 바다를 향해 거침없이 뚫려 있고, 아무런 장식과 덧칠이 없는 노출 콘크리트 건물엔 자연스레 빛이 스며든다. 인위적인 모습이 아닌, 시간과 빛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중정에 담았다. 이곳에서 지금까지 여섯 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솔크 연구소(네이버 캡쳐)


그러고 보면 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창의적 영감, 영혼의 울림 같은 것들.


매일 산책을 한다.

걷다 보면 어느 틈에 막힌 것들이 뚫린다. 얽힌 복잡한 관계가 단순하게 보인다. 쓰다 덮어둔 글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그래, 그걸 버려야겠어. 과감해진다. 이따금 새로운 생각이 쏟아 오른다.

비록 탁 트인 코발트 빛깔 바다는 보이지 않아도 산책로는 내게 무한한 영감을 선물하는 장소다.


높은 하늘과 저 멀리 구름 드리운 계족산이 보인다. 짙은 숲이 시원한 바람을 보내면, 나는 홀로 영혼의 말을 주고받는다.


<2019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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