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만 찾는 엄마

동생과 함께 하는 우중(雨中) 나들이

by 제인



큰 언니가 제일 먼저 엄마를 보러 요양 병원에 갔다. 지난주 금요일.

코로나 때문인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언니는 엄마를 만났다. 엄마 얼굴은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머리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정신도 온전한 것 같았다. 귀가 잘 안 들려하면 간호사가 귓전에 바싹 붙어서 친절하게 말을 옮겨줬다.

이걸 어떻게 봤냐 하면 언니가 엄마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가족 카톡방에 올렸기 때문이다.


-얘들아, 자주 오너라.

한 마디 하고 엄마는 뭔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언니가 형제들 이름을 차례로 대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자 엄마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다섯 남매다. 엄마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엄마가 기억하는 건 오직 맏아들, 내 남동생 밖에 없었다. 엄마는 걔가 왜 안 오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눈을 한 번 찔끔 감았다 떴다. 슬픈 것 같았다. 동생은 아직 엄마를 보러 가지 않았다.


언니가 엄마의 동영상을 올렸을 때 나는 보지 않았다. 하루가 마칠 무렵에야 톡방에 들어가 영상을 틀어봤다. 처음엔 서운했다. 여전히 아들만 찾는구나 싶었다. 옛날 감정이 되살아났다.


-올 필요 없다. 뭐 하러 차비 들여 고생하며 오니? 동생 있으니 됐다.

뚝 끊어지는 전화. 신호음 울리는 전화기 들고 눈물 삼킨 게 어디 한두 번이었나.


하루가 지나서야 설운 마음이 사라지고, 이제 엄마는 아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참 나잇값을 못 하는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구나, 싶었다.


사랑은 공평하게 흐르는 게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더 아픈 손가락이 있다. 손자를 각각 맡아서 키운 어느 집에선 손자들 싸움이 사돈 싸움이 됐다지 않은가.

그제야 엄마를 보러 갈 용기가 났다. 그간 어떻게 변했을지 몰라 엄마를 만나는 게 두려웠다. 영상을 보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됐다.


하지만 내가 갈 게 아니라, 동생이 가야 했다. 동생은 엄마를 보려 하지 않는다. 나는 동생을 엄마에게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지난번에 생각한 대로 동생을 우울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게 해야 한다.


-담 주에 내가 엄마 보러 갈게.

늦은 밤 동생에게 전화했다.


면회는 일주일에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한 명만 가능하다.

동생은 흔쾌히 그러라고 대답했다.


-너도 같이 가자.

-왜? 한 명 밖에 안 돼.

-난, 밖에 있을래. 너만 들어가. 엄마가 보고 싶어 하는 건 너야.

-… 아니야. 엄마는 자기를 집에 데리고 가라고 나한테 말하려는 거야.

-그래도.

-….

동생은 잠시 말이 없었다.


우린 그날 만날 시간을 정했다. 잠시 후 나는 엄마를 만나고 나서 미술관 가자는 말을 꺼냈다.


-미술관은 무슨. 요즘 그렇게 다니면 안 돼. 조심해야 해.

동생은 한 마디로 내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동생이 그러리라 짐작했다. 어떻게 할까.

대구미술관 관람은 미리 예약해야 한다. 우선 예매 사이트를 들어가 보기로 했다. 관람료는 무료였다. 두 사람 예약도 가능했다. 입장 시간에 50명만 받는다. 이런 분위기라면 충분히 여유 있게 동생과 관람하며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다. 엄마 때문에 움츠린 동생에게 화가는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주겠지. 문화가 주는 위로가 있다는 걸 나는 믿는 편이다. 상황 봐서 어떻게든 동생을 미술관으로 끌어내야지 마음먹었다.


열심히 예매 사이트를 들락거리는데 동생이 카톡을 보냈다.

‘매그넘 인 파리’ 사진전이 대구에서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이거 갈까?

내가 물었다.

-좋지.

나는 얼른 이 표도 두 장 예매했다.




‘파리’라….

나는 몇 번 다녀온 곳이지만, 동생은 한 번도 가지 못한 곳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사진에 관심이 있는 걸까?

내가 좋아할 줄 알고 가자고 한 걸까?


예매했다고 하니, 동생은 내가 하려 했는데,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려면 어떠니.


그날 우리는 엄마를 보러 갔다가 '매그넘 인 파리'사진전을 보고 오후에는 ‘팀 아이텔’ 전시회를 보기로 했다. 하루에 전시회를 두 곳 간다는 게 무리라는 걸 알지만, 동생이 움직이는 게 어디냐 싶어서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지치도록 돌아다니는 게 좋을 때도 있다.



엄마를 만나는 시간은 5분이라 했다. 칸막이가 없으면 안아줄 텐데. 손 잡고 뺨에 뽀뽀해줄 텐데. 그러면 엄마는 늘 얘가 왜 이러냐, 밀어내면서 웃었다. 싫어하지 않았다.


내려가긴 쉽고 올라가긴 어려운 게 사랑이라던가. 나는 요즈음 엄마보다 동생이 더 걱정이다.

엄마가 이리되고 나서, 형제들 중 형편이 바닥을 치는 사람이 생기고 나서, 우리는 전보다 더 애틋하게 가까워졌다. 흥부 가족 같은 느낌도 든다. 말없이 서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한다. 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작은 언니는 천 마스크를 열 장씩 만들어 형제들에게 보냈다. 막내도 일정 부분 병원비를 부담했다. 큰 언니는 선뜻 엄마를 찾아갔다.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말하는 이 없이 우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한다.


‘은밀한 생’에서 파스칼 키냐르는 위기 상황에서 세 남자 중 어느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고를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남편과 아들, 남자 형제 중 고르라 한다. 파스칼의 대답은 ‘남자 형제’이다. 남편은 다시 만나면 되고, 아들도 다시 낳을 수 있는데, 어릴 적 같은 시기를 보낸 남자 형제는 다시 만들 수 없다나.

지친 중년 남자의 모습에서 나는 하얀 교복을 입은 사춘기 싱그러운 학생을 떠올린다. 몰래 담배 피우다 들켜서 멋쩍은 표정을 짓던 때를. 머리가 여물기보다 키가 훌쩍 자라던 때를. 누나 손을 잡고 걸어가던 초등학교 2학년 남자 아이를.


우중(雨中) 나들이가 되겠네.

기차표를 끊으며 나는 동생과 만날 날을 기다린다.





#'매그넘 인 파리' 대구 사진전

#'팀 아이텔 전' 대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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