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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ug 13. 2020

전, 미국인이에요

내가 실수한 걸까?


오래전,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랫집에 같은 또래 친구가 있었다.

엄마들도 나이가 비슷해 우리는 거의 매일 집을 오가며 차를 마셨다. 아이들 이야기에 남편 이야기, 화제가 끊이지 않아 그녀와 나는 차츰 좋은 친구가 되었다.


두 녀석은 매일 붙어 다니며 놀았는데 어느 날 무슨 다툼이 있었는지, 방에서 아들이 나를 불러대는 것이었다.  

녀석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씩씩대고 있었다.


-엄마, 철수가 자기는 미국인이래.

아들이 말했다.


-미국인?

나는 철수를 돌아봤다.


-철수야, 네가 왜 미국인이야? 한국인이지.

-아니에요. , 미국인 맞아요. 엄마가 미국인이라 했어요.


철수는 아마 미국에서 태어난 것 같았다.


-아, 철수야. 미국에서 태어났다고 그러는 거지? 그건 국적이 미국으로 되어 있다는 뜻이지. 넌, 지금 이중 국적을 가진 거야. 하지만 넌 한국인 맞아. 엄마, 아빠도 한국인인데, 네가 미국인이면 좀 이상하지 않겠니?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아들은 편들어 준 엄마 때문에 기가 살았지만, 철수는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비긴 어게인’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친구가 동영상을 하나 보냈다. 친구는 헨리의 팬이다.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 한 번 봐. 퍼펙트 해!


이전에 나는 헨리가 바이올린 켜는 것만 봤기에 제철소에서 온갖 연장을 타악기로 활용해 노래 부르는 모습이 무척 놀라웠다.


며칠 후 유튜브에서 헨리의 영상이 하나 뜨기에 나는 관심을 가지고 봤다. God의 '길'이란 노래를 불렀는데, 헨리는 한국에 처음 와서 너무 힘들었을 때 들었던 노래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노래를 마친 헨리에게 다들 외국인이라 더 힘들었을 거라는 말을 던지는 게 아닌가. 외국인이라고? 헨리가?


친구에게 물었더니, 핸리는 캐나다 교포 2세일 거라 했다.


예전에 비해 뭔가가 달라졌다.

꼭 잡고 있던 걸 자연스레 풀어준 느낌이랄까. 이제는 다들 자연스레 교포를 외국인이라 부른다.


한 10년 전인가?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자기 아내 이야기를 했다. 아내가 캄보디아인이라 했다. 그날 들은 이야기는 주로 캄보디아 여자가 얼마나 비문화적이고, 게으른가 하는 이야기였다. 나는 말없이 들었다. 몇 백만 원어치 선물을 사 들고 아내의 친정에 갔다가 아들이 모기에 잔뜩 물려 호텔에서 잤다나, 황급히 돌아왔다나. 기사는 자기 동생도 캄보디아 여자랑 결혼했다고 말했다.


아, 생각보다 외국 여자랑 많이 결혼하는구나. 나는 좀 놀랐다. 한 집에 두 여자가 캄보디아인이라는 사실에. 택시 기사는 내가 열심히 들으니 더 신이 나서 아내와 제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생판 남에게 자기 아내 흉을 보는 남자라니!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자라온 환경이 다른 두 사람이,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기를 낳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신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이후 신문이나 방송에 이주민이나 다문화 가정 이야기가 나오면 관심이 갔다. 시골 초등학교에 다문화 가정 자녀의 비율이 무척 높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우리도 옛적 살기 힘든 시기에는 다들 미국, 독일, 멕시코로 갔다. 독일의 광부와 간호사가 부쳐 준 돈으로 부모, 형제, 나라가 버텨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조금 더 살기 좋은 나라로 가려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 같았다.


지난번에 한 친구는 며느리가 미국 들어가기 전에 아기를 낳았다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들이 약지를 못해서.


사실 우리가 바로 앞서 물어봤다.

-왜, 여기서 낳았어? 곧 들어갈 건데. 미국 가서 아이 낳지.

무심결에 이렇게.

다들 그러니까.




아이들이 싸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철수 엄마랑 차를 마셨는데, 아이들 싸운 일이 생각나서 말을 꺼냈다.


-철수가 자기가 미국인이라 하길래 내가 말해줬어. 넌, 한국인이라고. 국적만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 말해줬는데….

철수 엄마는 내 말에 가타부타 아무 도 하지 않았다.

 

난, 뭔가 실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곳이 자기 나라지.

-무슨 소리. 자기의 뿌리를 잃으면 안 되는 법이야.

-글로벌 시대잖아. 여섯 명만 건너면 세상 누구와도 연결된대. 지구는 이미 하나의 나라야.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남편의 성은 김해 김 씨이고 고향은 제주도이다. 시댁에 갈 때마다 아버님은 김해 김 씨 몇 대손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지난번엔 족보 책도 다시 만들어 주셨다. 제주도 토박이들의 성씨는 ‘고’ ‘양’ ‘부’이기에 나는 이따금 남편에게 당신은 육지에서 유배 간 양반의 후손 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다들 그렇지 , 뭐” 웃는 걸 보니 남편은 그 말이 싫지 않은 모양이다. 


『정재승・진중권의 크로스』에서 정재승 박사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내 조상이 어디서 살았는지 내 몸속에 다양한 민족의 피가 얼마나 섞였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45만 원만 지불하면 ‘23andME' 키트가 집에 온다. 키트에 침을 뱉어서 보내면 일주일 안에 갖가지 유전 질환에 걸릴 가능성과 내 혈육의 뿌리를 샅샅이 알 수 있다. 유전자가 포함된 인간 염색채의 개수가 23이라 그리 이름 붙였다나. 이 서비스를 '타임지'는 2008년 '올해의 발명품'으로 선정했다. 이제 구글은 세상의 정보만이 아니라 우리 몸속의 바이오 정보에도 관심을 가진다. 과학의 발달이 섬뜩하다. 


외세의 침략이 많은 나라였으니, 나의 부모, 그 윗대, 그 윗대를 계속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일본인이나, 중국인의 피 한 방울 정도는 섞여 있을지 모른다. 미국인이나, 유럽인의 피가 섞여 있을 확률은 조금 덜 하겠지만. 



#『정재승・진중권의 크로스』웅진 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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