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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ug 14. 2020

같은 시간 다른 기억

물에 잠긴 닭장



장마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넘었다. 많은 비가 내렸다. 유례없이 긴 장마라고 뉴스마다 시끌하다. 집에만 있어도 불어나는 하천의 강물을 바라보면 마음이 심란했다. 자다가 한 번씩 깨서 창문을 닫거나, 세차게 창문을 두들기고 흐르 빗물을 바라봤다. 다행히 남편이 출근하는 아침에는 비가 그쳤다. 이상하게 이번 비는 밤에 많이 내렸다.


-그래도 밤에 많이 와서 다행이야.


남편이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물에 떠내려가는 거야. 밤에 갑자기 비 오면 대책이 없지. 산사태가 나기라도 하면 자다가 죽는 거야.




친정에 갈 때면 전날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을 주섬주섬 가방에 챙겨 넣는다. 냉동실에 얼려 놓은 쇠고기를 꺼내고, 멸치볶음이나 깻잎조림 같은 반찬도 덜어 간다. 이것저것 넣다 보면 무거워져서 한 번씩 가방을 어깨에 메어 본다. 들고 갈 수 있으려나. 오랜만에 가는 친정이라 엄마랑 동생만 사는 집의 냉장고를 무엇으로든 채워 놓고 와야 할 것 같았다.


작년 가을에는 녹두 삼계탕을 들고 갔다. 어릴 때 자주 먹어서인지 나는 피곤하거나 몸이 안 좋으면 달걀이나 닭고기가 먹고 싶다. "우리 삼계탕 먹을까?" 하거나, 달걀 잔뜩 풀어 두툼한 달걀말이를 해놓으면 남편은 “너, 어디 몸이 안 좋구나” 알 정도로.


가방에서 삼계탕을 꺼냈더니, 동생이 보고 웃었다.


-누나, 엄마 삼계탕 안 먹어.

-왜?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힐끗 보더니 “난, 닭고기 안 먹는다” 하고는 방에 횅하니 들어가 버렸다.

당황스러웠다. 그제야 생각이 미쳤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우리는 시골로 이사를 다. 아버지는 무언가 새 사업을 시작한 눈치였는데, 집에 가져오는 돈이 들쭉날쭉했다. 엄마는 닭을 키우기 시작했다. 제법 큰 양계장이었다. 엄마 혼자 일을 해내지 못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을 거들 젊은이를 채용했다. 


케이지라 불리는 철창에는 닭이 한 마리씩 들어가 있다. 철창 닭이 제 자리에서 한 바퀴 돌 수도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하루에 두 번씩 홈통에 모이를 주고 물을 흘려보내야 했다. 닭은 하루에 알을 하나씩 낳았다. 이사 온 동네에 친구가 없어서 심심했던 나는 방과 후면 닭장에 가서 일하는 청년을 따라다녔다. 또르르 굴러 나오는 달걀을 주워 난좌에 담거나, 물 주는 호스를 잡고 서 있거나 했다. 

닭장 옆에는 갓 태어난 병아리를 풀어서 키우는 작은 닭장이 붙어 있었다. 닭에 비해 병아리는 비교적 자라는 환경이 좋았다. 원뿔 모양으로 된 통을 뒤집어 사료를 부어놓으면 사료가 조금씩 빠져나와서 병아리들은 아무 때나 자유롭게 모이를 먹을 수 있었다.


달걀 판매가 주 수입이었지만, 이따금 마을 사람들이 닭을 사러 엄마는 닭장에서 나이 든 닭을 꺼내 수돗가에서 칼로 목을 쳤다. 물을 끓여 뜨거운 물에 닭을 튀긴 후 털을 뽑았는데, 몇 년 후 털 뽑는 기계가 나올 때까지 엄마는 이 일을 계속했다. 아버지가 이 일을 하는 건 본 적이 없다. 온전히 엄마 담당이었는데, 닭이 도망치느라 난장을 치고 피가 튀어서 끔찍했던 기억이 다.


닭장을 드나들던 그 시간이 나에겐 좋은 추억이었고, 엄마에게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징글징글한 기억었다.


-괜찮아. 난 늘 닭고기가 먹고 싶었어. 엄마가 싫어하니 나도 덩달아 못 먹었지.

오랜만이라며 동생은 삼계탕을 맛있게 먹었다.




그 무렵 어느 겨울. 한밤중에 엄마가 급히 우리를 깨웠다.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 며칠 전에도 병아리들이 얼어 죽었기에 엄마는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눈 비비고 일어난 우리 형제들은 주섬주섬 옷을 입고 병아리 닭장으로 갔다. 병아리는 잔뜩 모여서 몇 층으로  포개져 있었다. 체온을 유지하려고 병아리는 다른 병아리의 등을 타고 위로 위로만 올라갔다. 우리는 밤새 "훠이 훠이" 소리치며 병아리들을 흩었다. 다음날 아침에 엄마는 깔려 죽은 병아리들을 대야 한가득 담아 집 앞에 내놓았다. 마을 사람들이 좋아하며 가져갔다.


여름밤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우리 집은 지대가 도로보다 낮아서 물이 밤새 마당으로 흘러 들어왔다. 물은 고스란히 병아리 닭장으로 들어갔는데, 우리는 자느라 병아리들이 죽는 줄도 몰랐다. 다음날에도 엄마는 대야 한가득 죽은 병아리를 꺼내 놓았다.






계속 비가 내리고, 외출도 못하니 남편이 갑갑해했다.


-우리 어디 잠깐 여행 다녀올까?

-응, 가까운 데 가서 하루만 자고 오자. 부여나 공주라도.

검색해서 갈 곳을 정했는데, 어쩐지 망설여졌다.


-며칠 지나서 갈까? 수해 나서 저 난리인데. 놀러 가기가 좀… 지난번에 신문에 보니까 중식당 하는 사람들도 장사 하루 쉬고 수재민들 자장면 만들어주러 가던데.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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