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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pr 09. 2021

재미있는 인생

다른 포켓에 담긴 친구들




"알랙산드로 로스토프는 과학자도 아니고 현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예순넷이라는 나이를 먹은 그는, 인생이란 것은 성큼성큼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만큼은 현명했다. 인생은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다. 주어진 하나하나의 순간마다 천 번에 걸친 변화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우리의 능력은 흥하다가 이울고, 우리의 경험은 축적되며, 우리의 의견은 -빙하가 녹듯 매우 느리지는 않다 해도 적어도 천천히 점진적으로 -진화한다. 소량의 후추가 스튜를 변화시키듯,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에이모 토울스의 책  『모스크바의 신사』 한 대목이다.


얼마 전부터 페이스 북에 빠져 있다. 페이스 북을 시작한 게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5년, 7년 전의 봄꽃 사진이 이따금 올라오는 걸 보면 상당히 오래전에 시작한 것 같다. 예전엔 가끔 사진이나 올리는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글을 쓰고 수시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코로나 감염으로 외출이 줄면서 관심이 이쪽으로 쏠렸다. 저녁 식사 후 남편이 텔레비전에 몰두하면 나는 방에서 페이스 북을 한다.


페이스 북에서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책과 영화를 좋아하고 음식 만들기와 사회, 정치 이슈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공감하는 글을 올린 사람과 친구가 되고, 듣기 불편한 말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하게 되면서 도토리 키 재기하듯 시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고양이를 키우며 요리가 취미인 삼십 대 후반의 남자. 내 나이 또래로 이따금 우스개 이야기를 올리는 남자. 우리 집 책장에 꽂혀있는 책의 저자. 영화 평론가. 스페인어 번역가. 노인 요양원 원장. 신문 기자. 칼럼니스트. 현실에서 만나기 힘든 사람들을 나는 페이스북 친구로 만난다.


내가 친구로 여겨도 그들은 아닌지 모른다. 친구라 여기는 건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의 생각과 삶을 지켜보는 게 재미있다. 우리의 의견이 모두 일치하는 것도 아다. 이슈마다 각양각색이고 미세한 차이가 있다.

그럴 때는 ‘이런 생각도 있구나’, 사고의 폭이 확장되 갖는다.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들을 가상의 공간에서 만나는 게 즐거웠다. 


『모스크바의 신사』에서 로스토프 백작은 색색의 단추를 섞이지 않게 여러 포켓에 분류해 담는다. 나도 그처럼 페이스북에서 만난 이들을 현실의 친구들과 분류해 다른 포켓에 담아 놓았다.


그러다 보니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한시도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수시로 들여다보고, 어떤 글이 올라오나 궁금해하고, 친구의 친구로 이어지는 대열에 합류하느라 머리를 들이밀고.

차츰 ‘몰두’의 단계를 넘어서 페이스북에 ‘중독’되었다.


이런 깨달음이 온 건 간밤에 겪은 일 때문이다. 어느 젊은 국회의원의 페북에서 '채식 ' 에 관한 기사를 읽었는데 서울시 교육청에서 초, 중, 고등학교에 한 달에 두 끼 채식을 실시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래 실린 댓글들은 모두 반대였다. 충분히 고기를 먹여야 할 아이들을 섣불리 이용하지 말라는 거였다. 진보적 교육감의 결정이 진보 성향의 방송에 실려서인지 모른다.


이용? 어디에?

의아해서 나는 댓글을 꼼꼼히 읽어봤다. 채식을 강요하는 채식주의자에 대한 불편한 마음, 환경주의자들을 위선적으로 보는 시각, 진보적인 교육감의 정치적인 결단으로 보는 의견이었다. 글을 쓴 이들은 글을 작성한 정치인 또래  2, 30대 남자들로 보였다.


이전에 나는 나와 생각이 다른 이런 글에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섣불리, 조심성 없이 댓글을  것은 그 기사를 올리고 반대하는 의견을 제시한 이가 이전부터 관심 있게 지켜보던 내 포켓에 든 친구이고, 앞으로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젊은 정치인이기 때문이었다.


한 달에 두 끼 채식을 실시한다는 건 지구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교육 차원에서 좋은 것 같다고 썼더니 줄줄이 반발하는 댓글이 달렸다.

한창 크는 아이들에겐 식물성 단백보다 동물성 단백이 필요하다는 댓글은 좋은 의견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플라스틱 비닐을 안 쓰고, 샴푸 대신 식초로 머리 감고 매일 채소만 먹냐는 비아냥 거림에는 마음이 상했다. 비난과 조롱이 이어져 계속 읽을 수가 없었다. 거기는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내 뜻을 전하고 싶었다.


"앞으로 세계의 가장 큰 위기는 기후 문제이고, 지금의 펜데믹도 그 예고일 수 있어요.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가장 발 빠른 대처는 육식을 줄여 축산물의 공장 식 축산을 막는 일입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우리가 날씨다』를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채식주의자가 되라는 게 아니라 하루 세 끼 중 한 끼만 육식을 해 고기 섭취를 조금 줄이자는 겁니다. 아이들도 각 가정에서 매 끼니 고기를 먹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한 달에 두 끼 정도 채식을 하자는 건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는 좋은 교육입니다. 육식 대신 콩고기와 두부로 영양을 채워 준다지 않습니까."


이런 말들은 그들의 가슴은 고사하고 발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들은 채식과 환경의 연관성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하는 말은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공허한 울림일 뿐이었다.

기다렸다가 미래에 배양육이 판매되면 그때 해도 될 걸 왜 이러냐는 말에 지구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아니, 지구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고, 인간이 사라질 거라는 말도.


그들 사회에 대한 분노에 차 있었고 특히 채식주의자, 환경주의자에 대한 반감이 컸다. 채식을 강요받는 걸 싫어하고, 환경주의자를 ‘내로남불’ 위선자로 여기는 것 같았다. 아마 최근의 위안부 할머니와 관련된 정의연 사태, 가덕도 공항 건설에 대한 환경 단체의 침묵,  불공정한 대학 입학과 같은 일들이 그들에게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과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심어줬는지 모른다.


채식주의자도 아니고, 환경주의자의 명함도 못 내미는 나는 억울했다. 쏟아지는 비난은 내가 받을 대접이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설득하느라 그들과 싸우기보다 상처를 덜 받는 길을 택했다. 페북을 빠져나왔다. 나는 그들의 분노가 무서웠다.


그러고 나니 그간 지나치게 소셜 미디어에 빠져있었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낄 자리 안 낄 자리 구분 못한 나를 바라보게 됐다. 절제가 필요했다.

나는 핸드폰에서 페이스 북 앱을 삭제했다. 몇 달간 안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사라져도 페북 친구들은 아무도 눈치 못 챌 것이고. 가상공간의 헐거운 관계가 좋은 점도 있었다.


젊은이들에게 혼난 일이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고, 어디에 빠져 있었는지를 깨닫게 했다. 그렇다고 앞으로 나의 주장 접지는 않을 것이다. 쉬었다가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의견을 말해볼 심산이다.


코앞에 취직과 결혼, 살 집을 장만해야 하고, 고된 직장 일이 기다리고 있는 그들에게 내 말은 철없는 호사로 들렸을 것이다. 메신저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에  메시지는 효과가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와 내 관심사가 다르니 접점을 찾기는 힘들겠지만. 나는 전하고 싶다. 자칫하면 우리가 평생 마스크를 쓰고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꼭 내가 아니더라도 내 포켓에 담긴 신실한 메신저를 통해 알릴 길도 있을 것 다.


간밤엔 우울했지만 아침에 밝은 햇빛을 만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일을 겪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들생각을 알게 되어서, 지구 환경에 대해 어떻게 의식하고 있는지 우리의 현주소를 깨닫게 되어서. 

이래저래 재미있는 인생이다.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가장 현명한 지혜'는 늘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신사』 나오는 몽테뉴의 격언이 떠오른다.


#모스크바의신사

#우리가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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