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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pr 11. 2021

영화 '자산어보', 형제의 길

조선의 벨 에포크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는 정조 승하 후 천주교 박해로 정 씨 가문의 세 형제가 끌려가 관에서 문초받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형제는 제각기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맏이인 약전(설경구 역)은 배교하고, 둘째 약종(최원영 역)은 스스로 체포되어 순교의 길을 택하고, 막내 약용(류승룡 역)은 환란을 예감하고 관직을 사퇴하며 정조에게 자명소(自明疏)를 올렸습니다.


“서학을 접하면서 마음자리에 기름이 스며들고 물이 젖어 뿌리가 튼튼히 박히고 가지가 얼기설기 뻗어나갔습니다”


18세기 조선의 유학자가 먼 이국의 신을 만나서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사모하였으며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한 적이 있다고 왕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소(疏)를 보니 임금 정조와 신하 약용의 군신 관계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저만의 생각일까요?





며칠 전 신문에서 한국 고전번역원에서 주요 역사 인물의 관계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한국 고전 종합 DB 인물관계 정보서비스’를 공개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서비스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정약용(1762∼1836)의 집안을 예로 들었더군요. 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을 넣으면 가족과 교유했던 이, 사제로 관계를 맺었던 이들이 주르륵 함께 검색되는 식이었어요.


왜 하필 수많은 인물 중 정약용을 예로 들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저는 곧바로 답을 찾았습니다. 우리나라 어느 시기이든 왕을 제외하고 이 나주 정 씨 집안만큼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없거든요.

‘자산어보’ 영화를 봐서인지,  저는 이 집안의 여러 이야기들이 마치 넷플릭스 드라마 보듯 이어져 떠올랐습니다.


진주 목사였던 정재원의 첫 부인이 아들 약현을 낳고 죽습니다. 이후 재원은 재가를 하는 데 두 번째 부인이  정선,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 후기 3재로 불리는, 우리가 눈 부리부리한 초상화로 익히 아는 공재 윤두서의 손녀인 해남 윤 씨입니다.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고산 윤선도로 연결되는 아주 막강한 집안이에요. 그녀는 약전, 약종, 약용과 딸을 낳습니다.


후일 신유박해(1801)로 나주 정 씨 집안은 쑥대밭이 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핵심 활동을 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이 집 가계도에 있습니다.

맏이 약현의 처남이 이벽인데, 그는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습니다. 정 씨 형제들이 서학을 접하게 된 계기가 큰 형수(약현의 처)의  제삿날 경기도 마재를 다녀오는 배 안에서 이벽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들은 곧 여주 천진암 주어사에서 권철신을 스승으로 서양의 철학과 수학, 종교를 공부합니다. 이를 계기로 『천주실의』, 『칠극』을 구해 읽으며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지요.

북경을 오가며 프랑스 신부에게 서양 학문을 배우다 세례를 받은 한국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이 이 집안의 사위입니다. 정 씨 형제들과 처남 매부 간이죠.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1791년, 신해박해)은 이들과 외사 촌간이고, 동지사 통역관으로 북경을 아홉 차례 왕래하며 교황청에 편지를 보내 조선 교구를 결정하게 한 정하상은 약종의 둘째 아들입니다. 신유박해의 빌미를 제공한 백서(帛書) 사건의 황사영은 약종의 제자이며 약현의 사위이지요. 한 시대를 흔든 집안이라는 의미를 이제 아실 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몰락한 집안의 후예로 낙향해 살다가 스무 살에 서울로 올라가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세운 불굴의 인물 정하상으로, 군신 관계라기엔 너무 가까웠던 정조와 정약용의 관계로, 열여섯에 소과에 급제해 스무 살이 되면 부르겠다던 임금이 잡은 손에 늘 붉은 비단을 감고 다녔던 황사영의 추락으로, 영화 몇 편 정도는 거뜬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충북 제천 배론 성지에 가면 황사영의 백서를 볼 수 있습니다. '배론'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웬 외국 이름인가 했어요. 배론은 입구와 출구가 좁은 산골짜기 마을로 모양이 흡사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 해요. 통행로가 으면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있기 좋았겠죠.

황사영은 토굴에 숨어서 흰색 비단에 1만 3천 자의 글을 붓으로 깨알같이 써서 북경의 파리 외방 선교회에 전달하려고 했죠.


 전 배론에 간 적이 있는데, 저는 백서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졌 속이 상했니다. 뛰어난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사라진 천재에 대한 안타까움과 백서가 복사본이란 사실 때문에요.

배론에 있는 백서는 원본이 아닙니다. 의금부에서 보관하다가 갑오경장 후 당시의 교구장이던 뮈텔 주교가 입수해 1925년 한국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 때 로마 교황에게 전달했다 합니다. 황사영 백서는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황사영 백서(길이 62㎝, 너비 38㎝)


이야기가 너무 천주교 쪽으로 흘러갔나요?





“나는 섬사람들을 널리 만나보았다. 그 목적은 어보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 말이 다르므로 어느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섬 안에 장덕순, 즉 창대라는 사람이 있었다. …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대체로 초목과 어조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직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 분을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 서적이라 할 만큼 치밀한 고증이 돋보이는 책.



정약전이 집필한 ‘자산어보’의 서문에 ‘창대’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영화는 창대를 어부로, 양반의 자손으로 설정합니다. 실제 창대가 어떤 인물인지는 '자산어보' 외에 드러난 게 없습니다.


스승 약전은 왕이 없는 세상,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는 세상을 꿈꿉니다. 제자 창대는 현실을 벗어나 벼슬길로 나아가고 싶어 합니다. 결국 스승과 제자는 반대편 길로 걸어가게 되죠.

그런데 의아한 게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스승은 말끝마다 제자를 ‘상놈의 자식’이라 부릅니다. 그는 왕을 배척하는 듯 보이지만, 하루빨리 해배에서 풀려나 예전의 안락한 양반의 지위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반면에 열심히 공부해 양반 자리를 꿰찬 제자는 지방 아전들의 횡포를 보고 있기가 심히 괴롭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이상과 현실의 다름에 좌절합니다. 원하는 길을 찾아가지 못하지요.


약전이 창대의 도움으로 '자산어보'를 저술하면서 약용에게 편지를 썼는데, 아우는 그림보다 글로 쓰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해줍니다. 또한 약전은 약용에게 조수가 발생하는 까닭은 달에 있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어요. 동생도 강진에서 자신의 책을 형에게 보내 충고를 구합니다.

형은 동생이 같은 기질로 같은 학문을 닦았기에 안목도 비슷한 것 같다고 감탄합니다.


“그 새로운 뜻을 밝힌 것이 내가 생각해 낸 것과 판에 박은 듯 똑같아서, 곧바로 자네의 손을 잡고 내 아우야! 내 아우야! 등을 두드려 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네.”


동생도 형의 조언을 따랐더니 의심스러운 글과 서로 맞지 않던 수(數)가 신기하게 들어맞아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정약용( 류승룡 분)




다양한 지적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활발하게 모임을 가지며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는 평화로운 시기에는 문화가 더 발달하는 것 같습니다.


1차 세계 대전 전의 벨 에포크(Belle Époque)가 그랬습니다. 벨 에포크는 프랑스 어로 '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인데, 19세기 말부터 1차 대전 전까지 전 유럽이 평화를 누리며 경제와 문화가 발전한 시기를 뜻합니다.


박해가 있기 전 1700년대 후반 조선이 그런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현명한 군주 아래 사회는 안정되었고, 중국을 통해 유럽의 문물이 스며들어왔지요. 이들 형제에게도 영광의 시기였고 보람찬 시절이었습니다.

정 씨 형제들은 함께 공부하고 함께 벼슬에 오르며 학문적으로 정신적으로 벗으로 지냈습니다. 서로가 신뢰하는 멘토였지요. 그들 형제의 삶과 저술이 조선 후기를 풍요롭게 했습니다. 후일 한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죽고, 두 사람은 살아 남아 멀리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가서 죽을 때까지 만나지도 못하고 편지로 소통했지만요. 이들의 추락이 조선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시대를 한참이나 앞서가 만민이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약전.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원했던 약용. 두 사람은 훌륭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에 반해 스스로 순교의 길을 택한 약종은 남긴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자손에 의해 그가 그토록 옹호했던 신앙이 이어지고 부흥합니다. 불에 탄 재를 막대기로 두들기면 다시 불꽃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요?  


영화 ‘자산어보’로 한 시대를 풍미한 나주 정 씨 집안의 형제와 그 주변 인물들을 기억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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