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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pr 13. 2021

작은 것들의 신

『작은 것들의 신』아룬다티 로이, 문학동네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


어떤 남자에게. 쌍둥이 아들이 있었다. 피트와 스튜어트. 피트는 낙관주의자, 스튜어트는 비관주의자였다.


아이들의 열세 번째 생일에 아버지는 스튜어트 -비관주의자 -에게 비싼 시계, 목공 세트, 자전거를 사줬다. 그리고 피트 -낙관주의자 -의 방은 말똥으로 가득 채웠다.


스튜어트가 선물을 열어보고 아침 내내 투덜거렸다. 목공구는 갖고 싶지 않았고, 시계는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전거 타이어는 원하던 종류가 아니라고.


아버지가 피트 -낙관주의자 -방에 가봤더니 피트는 보이지 않고 미친 듯이 삽질하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말똥이 온 방 안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너 대체 뭐 하는 거냐? 

아버지가 피트에게 소리쳤다.


똥더미 속에서 피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있잖아요. 아버지, 이렇게 똥이 많다면 분명 어딘가 망아지가 있을 거예요!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에 들어 있는 이야기다. 


지난여름 몇 년 만의 큰 비가 내렸다. 강물이 넘쳐 둔덕까지 차는 바람에 강변의 나무들이 모두 물에 잠겼다. 물이 빠지고 난 강변은 쓰러진 나무들로 처참했다. 나무들이 살아날 수 있을까? 뿌리 바로 위에서부터 옆으로 꺾인 나무들이라 죽을 거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봄이 되자 쓰러진 나무에 새순이 돋았다. 나무는 옆으로 자라고 있었다. 




지난달에 친구가 카톡으로 '여성의 날 테스트'라는 링크를 하나 보내줬다. '문학동네'에서 설문 조사로 취향에 맞는 도서를 추천하는 링크였다. 


https://munhakdongne2.netlify.app/?utm_source=munhak&utm_medium=instagram#.YEi6GHWf3SI.kakaotalk 


출판사는 내게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을 추천했다. 제목을 보니 어렴풋이 읽었던 기억이 났다. 내용은 가물가물 했지만. 집에 있었던 책인데 지난 설에 아들이 슬그머니 갖고 가 버렸다.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로 마음먹었다.  


책의 첫 문단과 끝 문단이 무척 아름답다.


아예메넴의 5월은 덥고 음울한 달이다. 낮은 길고 후텁지근하다. 강물은 낮아지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고요히 서 있는 초록 나무에서 검은 까마귀들이 샛노란 망고를 먹어댄다. 붉은 바나나가 익어간다. 잭 프루프가 여물어 입을 벌린다. 과일향이 진동하는 공기 중을 방종한 청파리들이 공허하게 윙윙댄다. 그러다 투명한 유리창에 부딪혀 떨어져서는 햇볕 속에서 당황한 채 죽어간다.


그녀는 그의 감긴 눈에 입맞춤을 하고 일어섰다.
벨루타가 망고스틴 나무에 기댄 채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른 장미를 머리에 꽂고 있었다. 
그녀가 뒤돌아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나알레이.”
내일. 


이란성쌍둥이 에스타와 라헬의 엄마 암무가 목수 벨루타와 사랑에 빠진다. 벨루타는 파라반이라 불리는 불가촉천민이다. 사랑은 어느 한순간 예고 없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열사흘. 

사촌 소피 몰의 죽음을 핑계로 경찰은 일곱 살 두 아이가 보는 앞에서 벨루타를 폭행한다. 


쌍둥이는 너무 어려서 이들이 역사의 심복일 뿐이라는 것을 몰랐다. … 이제 시작 단계인, 아직 인정되지 않은 두려움 -자연에 대한 문명의 두려움, 여성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 힘없는 자에 대한 힘 있는 자의 두려움에서 생겨난 경멸감. … 에스타와 라헬이 그날 아침 목격한 것은 지배권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을 보여주는 통제된 조건에서 실행된 임상 실험이었다. 구조. 질서. 완전한 독점을 추구하는 본성. ‘신의 의도’로 가장한 채 어린 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인간의 역사였다. 그들은 벨루타를 체포했던 게 아니라 두려움을 내쫓고 있었다. P421


소피 몰의 죽음은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작은 배가 뒤집혔을 뿐이었다. 에스타에게 경찰이 묻는다. 이 사람이 범인 맞냐고. 


그 아이는 그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말했었다. 네.
‘네, 이 사람이었어요.’
에스타의 문어文魚도 붙잡을 수 없었던 그 말, ‘네’. 청소기로 빨아들여도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그 말은 저기, 저 깊숙이, 어금니 사이에 낀 실 같은 망고 섬유질처럼 어떤 주름이나 골 안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빠질 리가 없었다. P52


상처 입은 남매는 각자 침묵으로, 공허로 살아간다. 




살아도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6월의 비’는.

지난주는 ‘소피 몰이 어떻게 생각할까?’ 주간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때 얘기였다. ‘공포의 시간 이전’의.

정말 어리석었던 것 같다. 너무나도 헛된 일이었다. 장작을 광택 내는 일처럼.


이야기의 배경인 1969년 인도 케랄라는 공산주의가 정치적 힘을 키우고 시리아 정교도와 힌두교도와의 갈등이 있었고 식민지의 잔재로 영국인들의 문화가 선망의 대상으로 남아있던, 무엇보다 여자의 인권이란 아예 없었던 시대였다. 촛대로 아내를 때리는 영국 제국주의 곤충학자. 옥스퍼드에 유학한 껍데기만 지식인이고 정신은 지주인 공산주의자. 


공산당이 인도 케랄라에서 왜 유독 그렇게 성공한 것인지 몇 가지 그럴듯한 이론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이 지역이 기독교인 인구가 많다는 것이었다. … 마르크스주의는 기독교의 대체물일 뿐이었다. 신을 마르크스로, 사탄을 부르주아로, 천국을 계급 없는 사회로, 교회를 공산당으로 대체했을 뿐, 그 여정의 형식도 목적도 유사했다. 장애물 경주인 것도, 종국에 선물이 기다리고 있는. P97



아룬다티 로이의 원고를 받은 영국 런던의 문학 에이전트 데이비드 고드윈은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인도로 가서 그녀를 만났다. 데이비드는 어떤 소설이든 첫 다섯 페이지, 혹은 열 페이지를 읽으면 자기와 함께 할 책인지 안다고 한다. 독창성과 스토리가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인도의 신분제도는 사랑의 방식도 가르친다.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영국이, 네덜란드가 들어오고, 바스쿠 다 가마가 오고, 가톨릭이, 공산주의가 들어와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가촉민은 불가촉천민을 집에 들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 스며든 굴종은 충성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고, 두려움은 폭력을 정당화한다. 관습으로 역사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은 개미에 물린 엉덩이, 토마토 샌드위치, 작은 것들을 바라보는데, 어른들은 큰 것만 바라본다. 신은 어디에나 있는데. 


때로 죽음에 대한 기억이 죽음에 도둑맞은 삶에 대한 기억보다 훨씬 오래간다는 것은 기이하다. … 세월이 흐르면서 소피 몰에 대한 기억은 서서히 희미해졌고, 소피 몰을 잃은 상실감은 점점 더 강해지고 생생해졌다. 늘 거기 있었다. 제철 과일처럼. 계절마다. 공무원직처럼 종신적으로. 그 상실감이 라헬을 어린 시절에서 여성으로 이끌었다. P31


은유를 담은 시적인 문장으로 책의 앞부분에 전체 내용을 암시해 놓았는데, 시간을 자유자재로 섞어 놓아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하지만 미끼를 물고 후반까지 끌려가면, 한 번 읽은 후 다시 정독하면, 모든 암시가 퍼즐 꿰맞추듯 연결된다. 맛깔스러운 문장을 음미하는 기쁨이 크다. 




봄 들판을 날아가는 하얀 솜털. 초록색 나무 틈으로 스며든 햇살. 탁, 탁, 골프 공치는 소리.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나이 든 부부의 꽉 부여잡은 손. 퍼드덕 날아오르는 검은 새의 하얀 깃털. 말라버린 갈색 나뭇가지. 옆으로 드러누운 채 자라는 나무의 초록 순. 꼿꼿하게 위로 뻗은 갈대. 회오리바람처럼 몰려다니는 하루살이 벌레들. 발아래 핀 파란 꽃의 다섯 이파리. 파꽃 같은 씨앗을 떠받들고 있는 민들레, 징검다리에 부딪히는 강물소리. 통통하게 기름 오른 오리 두 마리. 느릿느릿 산책로를 가로질러 기어가는 민달팽이. 젓가락질하듯 성큼성큼 걸어가며 물속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고니. 교각 위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기차. 


큰 것들만 바라보다가 어느 날 문득 작은 것들에 시선이 머물면 삶의 진리가 여기에 숨어 있다는 깨달음이 온다. 



#작은것들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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