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공항을 빠져나오며 무심코 흘린 말에 남편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하기에 나는 놀라서 남편을 쳐다봤다.
내가 이런 느낌이 든 건 이틀 전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나서부터다.
코로나 사태의 여파로 그간 제주 시댁에 자주 가지 못 했다. 작년 말에 남편이 혼자서 다녀왔고 이후 오 개월 만에 둘이서 다녀오는 길이다.
어머니는 음식을 잘 못 드셨다. 체중이 10킬로는 빠진 것 같았다. 엉덩이 살이 하나도 없고 원래 네모진 얼굴은 볼 살이 빠져서 세모가 됐다. 아버지는 눈 가장자리가 붉은 게 쾡해 보였다. 백내장이 와서 그렇다 했다. 아흔 다섯 동갑인 두 분의 핼쑥한 모습을 보니 가슴이 이리 봐도 철렁 저리 봐도 철렁했다.
그래도 나는 우스개로 “어머니, 예뻐지셨어요.” 인사했다.
저녁 밥상을 물린 후 아버지는 서랍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더니 속에 든 편지를 읽어보라 하셨다. 단정한 글씨는 ‘장례시에 유의할 사항’이란 제목 아래 비석의 앞뒷면에 새길 비문까지 세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장례식장 선정과 한 분이 먼저 돌아가실 경우 화장 후 봉안했다가 후일 합장하는 일, 사망 시 정부로 받는 소소한 혜택 등이 기록된 편지였다. 아버지는 6.25 참전 유공자이고, 어머니는 4.3 사건 희생자 유족이다.
아버지는 65세 되던 해 형제들을 불러놓고 재산 정리를 했다. 그때 금촉 달린 만년필까지 나누어 주신 기억이 난다. 자식들 의견을 물어서 연금을 반은 현금으로 반은 연금으로 수령하기로 결정했다. 몇 년 후 형제 중 한 명에게 아버지가 받은 현금이 고스란히 들어갔다. 아버지 또래에 현금으로 수령한 분들 중 그 돈을 유지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 반쪽 연금으로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고 여태 사셨다.
편지를 읽고 돌려드리니, 집에 가져가라 하셨다. 세 아들에게 줄 편지를 모두 써놓았다며. 선조들 것보다 크지 않게 만들어야 할 비석을 설명하며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가족 묘지가 밭 가운데에 있으니 씨 뿌리고 난 후에는 차를 몰고 들어와 다른 사람의 밭을 훼손하지 말라는 주의까지 주셨다.
-걸어 들어가야 한다. … 무겁지 않으니 가능할 게야.
말씀 중에 '화장하고 나면'이라는 작은 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다음날 아침, 산책하는 아버지를 따라나섰더니 멀리도 안 가고 바로 옆 물 마른 저수지를 세 바퀴나 도셨다. 길에서 지렁이를 몇 마리 봤다. 붉은 빛깔로 꿈틀거리는 녀석, 노랗게 몸이 말라 오그라든 녀석. 따뜻한 봄 햇살에 말라죽은 지렁이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시댁 화단에 나지막이 핀 노란 꽃이 예뻐서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아버지가 함박 웃으며 다가왔다. 따라오라 손짓하셔서 안채 옆을 돌아 쫄래쫄래 쫒아가니 안방 창으로만 볼 수 있는 화단이 뒤뜰에 있었다. 노란 꽃들이 검은 돌담 아래에 소복했다.
-낮이 되면 활짝 핀다, 많이 핀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한 낮이 되자 꽃은 아버지 말대로 활짝 입을 벌렸고, 저녁이 되자 꽃은 다시 잎을 오므렸다.
꽃명, 가자니아. 원산지, 남아프리카 (아버지의 수첩에서)
-오일 장 구경하러 갑시다.
아들의 말에 어머니가 어쩐 일인지 따라나섰다. 어머니는 외출을 싫어하신다. 이전에 우리를 따라나오신 적이 거의 없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간밤에 아들이 준 봉투에서 돈을 꺼내 값을 치르는 어머니는 집에서와 달리 활기차 보였다. 점심 먹으러 들어간 식당의 가파른 계단도 곧잘 올라가셨다. 하지만 구운 전복 두 개에 밥 몇 숟갈을 드시더니 곧바로 수저를 놓았다. 고등어 살을 발라 밥 위에 올려 드리니 싫다고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아버지는 잘 드시고 많이 드셨다. 오랜만의 바깥 음식이라 식욕이 동하는 것 같았다.
시댁에 있을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게 비행기를 타고, 자동차를 타면서 거리가 멀어지자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편지첫 장 아래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을 서두로 두 분 장례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왜 아버지보다 어머니 장례에 관한 글이 먼저일까?
아마, 그 순간이었을 게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실 거라는 느낌이 든 게. 어쩌면 두 분이 그렇게 정하셨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게.
한 분은 곡기를 끊듯 안 드시고, 한 분은 무척 많이 드시는 게 나는 심상치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먼저 떠나는 걸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암묵적으로 두 분이 그리 정하신 게 아닐까.
-어머니 먼저 가면 나는 어찌할지 모르겠다. 요양원에 가야 할까?
아버지가 남편에게 묻는 걸 나는 부엌에서 들었다. 남편은 묵묵부답 아무 말도 못 했고.
제주 마지막 날 밤에 근처에 사는 큰 시누이 부부랑 같이 저녁을 먹었는데, 매부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어머니 돌아가시면 저기 건넌방에 와서 처가살이할 게우다 아무 걱정 맙소.
우리 모르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한 후 나는 남편에게 어머니가 표시 나지 않게 조금씩 음식을 줄이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는 말을 꺼냈다. 남편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자기도 그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 링거라도 맞히면 좋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거부하겠지만, 혹시 아들이 제주에 가서 조르면 맞으실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