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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14. 2020

팥을 삶으며

난,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지난주, 나는 친구와 청주 문의면에 다녀왔다.

 

페북에서 만난 친구들이 문의면과 청남대, 마동 창작 마을을 이야기하길래 어차피 외국여행도 못하니 실속 있게 녀석들 오기전에 바람이라도 쐴 요량으로 하루 날을 잡았다.


그곳 로컬푸드에서 팥을 다.


하얀 선이 도드라진 팥은 이전에 내가 알던 팥과 달라 보였다. 딱히 필요해서도 아니었고 정미소 분위기의 매장이 너무 썰렁해 들른 김에 뭐라도 손 닿는 것 하나 사야겠다 싶어서 집어 들었다. 시골에선 그래도 돈 되는 게 팥 농사라는데, 하며.


냉장고 깊이 들어가면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것 같아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팥을 삶았다.


팥죽, 팥칼국수, 팥빙수. 생각이 스쳐갔지만 일단 삶아 설탕에 졸인 걸 한 숟갈 큰 녀석 입에 들이밀었더니

"할머니는 왜 내가 싫어하는 것만 줘요?" 퉁명스레 말하는 게 아닌가.


쇼크 먹은 난, 얼른 삶은 팥을 냉장고에 넣어버렸다.

'녀석들 가고 나면 팥죽이나 끓여 먹어야지'





그러면서 슬그머니 내일 밥 지을 때 한두 숟갈 넣어볼까, 궁리했다. 편식 심한 녀석들이 모르고 먹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팥은 흑미 같이 생김새가 길쭘했고, 삶아도 어딘지 쫄깃한 느낌이 들게 맛이 좋았다.




또래 친구들과도 사고가 다르면 말이 안 통하는 요즈음이지만, 손자 녀석들이 좋아하고 관심 있는 것들이 옛날과 너무 달라서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저녁마다 책을 읽어줬는데  '먹이연쇄'를 설명하는 책은 아이들 수준에 좀 버거웠다. 하지만 큰 애는 관심 있게 자꾸 그 책을 읽어달라며 들고 왔다.


"우유는 어디서 나오나요?"

젖소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더니, 곁에서 뒹굴뒹굴하며 형을 방해하던 작은 녀석이 이렇게 대답했다.


"냉장고에서요."




불 끄고 재우려고 노래 한 곡 불러보라 시켰더니, 작은 녀석이 중얼중얼 노래하는데 들어보니, 신비 아파트란 영화 노래 같았다. 그런데. 계속 귀신 이름을 나열하는 게 아닌가. 고양이 귀신, 하수구에서 나오는 귀신… 그 뒤는 알아듣지도 못했다.


하두 조르길래 할아버지가 신비 아파트를 한번 틀어줬더니, 눈 뜨자마자 쪼르르 달려와서 다시 틀어달래지 않나. 애꿎은 눈흘김이 누구를 향했는지는 쉬이 짐작하시리라.


짜장면을 좋아한대서 저녁에 만들었더니 큰 녀석만 먹고  작은 녀석은 싫어서 몸을 비틀었다.

달걀이랑 브로콜리를 먹였더니 작은 녀석이 잘 시간이 되어서 배고프다 했다. 미역국에 밥 말아 먹이려고 했더니, "며칠 전 먹었어. 할머니, 사골 줘." 하는 거였다. 사골이라니, 갑자기 나는 체온이 5도쯤 올라갔다.

열 받아 녀석 엉덩이를 한 대 때리고 남편에게 "걔 떠먹이지 마요, 절대로." 하고 방에 들어갔는데 밖에서 둘이서 오순도순 정답게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편식과 식사습관이 제일 문제라고 듣기 싫은 소리를 했더니 딸은 우울한 것 같았다.

"애들이 잘 크고 있는 것인지…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은커녕 둘 다 허덕이고 있는 나로서는 여하튼 마음이 좀 속상해. 애들이 알아서 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완두콩 좀 까보련? 녀석들은 직접 깐 완두콩은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팥 사건을 들은 친구는 킬킬 웃으며 왜 그렇게 애들 싫어하는 것만 주냐며 나를 놀렸다.


"요즘 아이들은 건강한 밥상을 싫어해."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배 고프면 다 먹습니다. 냉장고에 간식거리 없어지면 뭐든 잘 먹어요."

충고하는 이도 있었고.

난, 모두에게 손자 한번 키워보라고 말할 수밖에.


풍요로운 가운데 아이들은 어딘지 결핍이 있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가장 실패한 건 파인애플 볶음밥이었다. 아이들 입에 맞을 음식을 고르느라 검색하다 눈에 띈 게 베트남 쌀국수와 파인애플 볶음밥이었는데(사실 내가 먹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걸 만들어보려고 잘 익은 파인애플과 건새우를 샀다.


물놀이하는 녀석들에게 "짜잔!" 하며 꼬치에 꽂은 파인애플을 갖고 갔더니 혀를 한번 낼름 대보고는 둘 다 고개를 저었다. 먹어본 적이 없었던 거다. 하지만 난, 꿋꿋이 파인애플 볶음밥을 만들었다.


"레몬이 들었어."

작은 녀석이 숟가락으로 파인애플 조각을 밀어내며 말했지만, 나는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싫으면 골라내고 먹으렴."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녀석은 밥을 반 정도 먹고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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