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에서 만난 친구들이 문의면과 청남대, 마동 창작 마을을 이야기하길래 어차피 외국여행도 못하니 실속 있게 녀석들 오기전에바람이라도 쐴 요량으로 하루 날을 잡았다.
그곳 로컬푸드에서 팥을 샀다.
하얀 선이 도드라진 팥은 이전에 내가 알던 팥과 달라 보였다. 딱히 필요해서도 아니었고 정미소 분위기의매장이 너무 썰렁해 들른 김에 뭐라도 손 닿는 것 하나 사야겠다 싶어서 집어 들었다. 시골에선 그래도 돈 되는 게 팥 농사라는데, 하며.
냉장고 깊이 들어가면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것 같아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팥을 삶았다.
팥죽, 팥칼국수, 팥빙수. 생각이 스쳐갔지만 일단 삶아 설탕에 졸인 걸 한 숟갈 큰 녀석 입에 들이밀었더니
"할머니는 왜 내가 싫어하는 것만 줘요?" 퉁명스레 말하는 게 아닌가.
쇼크 먹은 난, 얼른 삶은 팥을 냉장고에 넣어버렸다.
'녀석들 가고 나면 팥죽이나 끓여 먹어야지'
그러면서 슬그머니 내일 밥 지을 때 한두 숟갈 넣어볼까, 궁리했다. 편식 심한 녀석들이 모르고 먹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팥은 흑미 같이 생김새가 길쭘했고, 삶아도 어딘지 쫄깃한 느낌이 들게 맛이 좋았다.
또래 친구들과도 사고가 다르면 말이 안 통하는 요즈음이지만, 손자 녀석들이 좋아하고 관심 있는 것들이 옛날과 너무 달라서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저녁마다 책을 읽어줬는데 '먹이연쇄'를 설명하는 책은 아이들 수준에 좀 버거웠다. 하지만 큰 애는 관심 있게 자꾸 그 책을 읽어달라며 들고 왔다.
"우유는 어디서 나오나요?"
젖소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더니, 곁에서 뒹굴뒹굴하며 형을 방해하던 작은 녀석이 이렇게 대답했다.
"냉장고에서요."
불 끄고 재우려고 노래 한 곡 불러보라 시켰더니, 작은 녀석이 중얼중얼 노래하는데 들어보니, 신비 아파트란 영화 노래 같았다. 그런데. 계속 귀신 이름을 나열하는 게 아닌가. 고양이 귀신, 하수구에서 나오는 귀신… 그 뒤는 알아듣지도 못했다.
하두 조르길래 할아버지가 신비 아파트를 한번 틀어줬더니, 눈 뜨자마자 쪼르르 달려와서 다시 틀어달래지 않나. 애꿎은 눈흘김이 누구를 향했는지는 쉬이 짐작하시리라.
짜장면을 좋아한대서 저녁에 만들었더니 큰 녀석만 먹고 작은 녀석은 싫어서 몸을 비틀었다.
달걀이랑 브로콜리를 먹였더니 작은 녀석이 잘 시간이 되어서 배고프다 했다. 미역국에 밥 말아 먹이려고 했더니, "며칠 전 먹었어. 할머니, 사골 줘." 하는 거였다. 사골이라니, 갑자기 나는 체온이 5도쯤 올라갔다.
열 받아 녀석 엉덩이를 한 대 때리고 남편에게 "걔 떠먹이지 마요, 절대로." 하고 방에 들어갔는데 밖에서 둘이서 오순도순 정답게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편식과 식사습관이 제일 문제라고 듣기 싫은 소리를 했더니 딸은 우울한 것 같았다.
"애들이 잘 크고 있는 것인지…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은커녕 둘 다 허덕이고 있는 나로서는 여하튼 마음이 좀 속상해. 애들이 알아서 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완두콩 좀 까보련? 녀석들은 직접 깐 완두콩은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팥 사건을 들은 친구는 킬킬 웃으며 왜 그렇게 애들 싫어하는 것만 주냐며 나를 놀렸다.
"요즘 아이들은 건강한 밥상을 싫어해."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배 고프면 다 먹습니다. 냉장고에 간식거리 없어지면 뭐든 잘 먹어요."
충고하는 이도 있었고.
난, 모두에게 손자 한번 키워보라고 말할 수밖에.
풍요로운 가운데 아이들은 어딘지 결핍이 있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가장 실패한 건 파인애플 볶음밥이었다. 아이들 입에 맞을 음식을 고르느라 검색하다 눈에 띈 게 베트남 쌀국수와 파인애플 볶음밥이었는데(사실 내가 먹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걸 만들어보려고 잘 익은 파인애플과 건새우를 샀다.
물놀이하는 녀석들에게 "짜잔!" 하며 꼬치에 꽂은 파인애플을 갖고 갔더니 혀를 한번 낼름 대보고는 둘 다 고개를 저었다. 먹어본 적이 없었던 거다. 하지만 난, 꿋꿋이 파인애플 볶음밥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