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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15. 2020

인순이의 ‘아버지’

노래 가사 어디에도 ‘아버지’란 말은 없었다


“화요일 저녁 미사 후 ‘인순이의 아버지’를 불러줄 수 있어요?”


주일 미사 마칠 무렵 신부님이 성가대를 보며 물었을 때 우리의 반응은 갑자기, 왜, 어떻게,였다. 


사실 난감했다. 무엇보다 이틀 후였다. 단원들은 어떻게 준비하냐며 당황스러워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지휘자를 보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음이 복잡해 보였다. 다음날 출장이 잡혀 있단다. 


“어쩌겠어요. 출장을 연기해야죠. 다음에는 미리 말씀해 달라고 해야지요.”


지휘자의 말에 나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눈치 없이 할 수 있다고 주위를 부추겼으니까. 


오후에 성가대 카톡방에 문자가 떴다. 다음 주 화요일이 성 요셉 축일이어서 신부님이 ‘아버지’를 불러 달라고 주문하신 거란다. 




성 요셉 축일'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예수님의 가정을 바라볼 때 요셉의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약혼녀의 잉태를 받아들였고, 헤롯 왕이 유아들을 살해할 때는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했으며, 평생 목수로서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요셉이 하는 말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는 항상 뒤에서 묵묵하다.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핸드폰에서 ‘인순이의 아버지’를 찾아 계속 듣고 있었다. 


평일 저녁에 예고 없이 성가 연습을 하게 되면 남자 단원들은 직장 때문에 거의 참석하지 못한다. 우리는 여성 합창으로 불러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휘자는 소프라노 알토, 두 성부가 부를 수 있게 곡을 편곡해 왔다. 

월요일 저녁 연습 시간에는 뜻밖에 많은 단원이 나왔다. 특히 남자 단원들이. 

지휘자는 약간 들떠 보였다. 연습은 순조로웠다. 당김음이 까다롭기는 해도 손으로 박자를 두드리며 서너 번 연습하자 그런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화요일에는 신자들이 많이 올 예정이라 했다. 신부님이 성당 요셉회 어르신들을 모두 오라고 했다. 모두 누군가의 아버지이니까. 


연습하면서 남자들은 어딘지 흥이 나 보였다. 어딘지 기가 살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를 기념하고 어머니에 대한 칭송은 많이 하지만 아버지를 기리고 축하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얼마 전 남편의 후배 장례식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나는 장례식 내내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늘 "형수, 형수!" 하며 살갑게 부르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울음을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남편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식장을 나오면서 남편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중얼거렸다. 


“너는 좋겠다. 울 수 있어서.” 

남편은 울고 싶은데 울음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남자들은 감정을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 하버드 의대의 하비 사이먼 교수는 남자들이 오래 살려면 '존 웨인 증후군'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존 웨인(1907~1979)은 미국 서부 영화의 주인공으로 ‘남자다움’의 대명사로 불리는 배우다. 


“넌, 남자니까.” 

“남자는 말이야.” 

“무슨 사내애가 그렇게⋯.”


이런 말 한 번쯤 듣지 않고 자란 남자는 아마 없을 터이다.





‘남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사회의 고정관념이 남자들을 얽어맨 건 같다. 솔직하고 자연스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건 남자답지 못한 일이었다. 사근사근하고 다정다감한 것도 마찬가지다. 남자라는 이유로 감정을 숨겨야 하고, 남자라는 이유로 속마음을 드러내면 안 되었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은 말이 남편의 울음 씨를 말렸는지 모른다. 

그렇게 사회가 규정한 남자, 아버지의 모습으로 살아왔으니 “아버지!” 부르는 소리만 들어도 그들은 가슴에 막힌 샘이 터지고 눈물이 흐른다. 


화요일, 그들은 신나게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마치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처럼. 노래를 부르는 중년의 남자들도, 듣는 노년의 남자들도 마음의 위로를 얻는 것 같았다.



한 걸음도 다가설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래왔는지
눈물이 말해준다.
점점 멀어져 가버린 쓸쓸했던 뒷모습에
내 가슴이 다시 아파온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 싶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다. 



이 노래는 딸이 아버지에게 부르는 노래일까? 아버지가 딸에게 부르는 노래일까? 

우리는 가사를 두고 설왕설래했다. 노래 가사 어디에도 ‘아버지’란 말은 없었다. 아버지는 어디에서나 늘 그런 존재인지 모른다.


(2019년)




#존 웨인 증후군

#인순이의 '아버지'

#성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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