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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14. 2020

브로크백 마운틴, 불편한 마음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어두운지 모른다


외면하던 것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데는 어떤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상영된 지 제법 된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이안 감독, 2005)을 새삼스레 찾게 된 것은 원작인 애니 프루의 단편『브로크백 마운틴』(전하림 옮김, 푸른 들)을 읽어서다.


8월에도 만년설이 쌓인 브로크백 마운틴 양 떼 방목장에서 일이라면 뭐든 절실했던 두 청년이 한 철을 같이 일하게 된다. 낯섦이 친밀감으로, 우정이 사랑으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할)은 바깥 세계와 단절된 깊은 산속에서 차츰 서로에게 빠져든다.


42개 나라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고, 한 나라의 수도에서 퀴어 페스티벌이 열리는 요즈음이 아니다. 들키면 린치 당하고 살해당하던 1963년 미국이 배경이다.


“난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야.”


두 사람은 애써 부정하고 헤어져 각자 결혼한다, 평범하기 위해.

하지만 인연은 다시 이어진다, 그러기를 이십 년.


“여자와 남자가 하는 사랑이랑 똑같아.”

영화를 본 후 친구에게 무심코 말했던 건 퀴어에 대한 나의 생각이 조금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일상에 많이 스며들어 있어. 어느 정도냐 하면⋯”

친구의 말이 이어졌다.


“팬픽(Fan-Fic)이라고 들어봤니? 팬이 쓰는 소설이지. 팬에 픽션(Fiction)이 더해져서 생긴 말. 자신이 좋아하는 드라마의 연예인이나 가수를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을 쓰는 거지. 처음 들어봤구나. 내가 동방신기를 따라다닐 때 -친구는 쉰이 넘은 지금도 동방신기 팬클럽 멤버이다 –팬들은 유노윤호와 영웅재중을 부부로 설정해 소설을 쓰곤 했지.

두 사람의 이름을 붙여서 윤재라 부르며. 요즘도 그들이 쓴 팬픽을 구할 수 있지. 쉬폰느, 마왕, 불멸의 연인 같은 거. 제목이 정확하진 않아. 오래전 읽었으니까. 달달해서 읽다 보면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가고 손발도 꼬이지. 수위가 좀 높아. 17 금정도?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아. 코믹한 것도 있고 아련한 것도 있어. 문제라면 대부분 미완이라는 거. 수준 높은 팬픽은 완성해 영화화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 물론 주인공 성별을 바꿔서.

팬 중에는 여러 가지 재주를 가진 녀석들이 많았어. 온갖 기술을 동원해 둘이 다른 자리에 있는 사진도 합성해서 한 자리에 있는 것처럼 만들곤 했어. 요즘 흔히 말하는 가짜 뉴스의 시초라 할까? 어쩌면 기획사에서도 은연중 그런 분위기를 조성했는지 몰라. 그들 입장에서는 막강한 팬덤만큼 확실한 인기몰이는 없으니까.

그들 비디오를 한번 보렴. 은연중에 이상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못 느꼈니? 그들이 데뷔한 게 2004년이니, 지금부터 십오 년 전이잖아. 그 무렵 그들을 따라다니던 애들이 지금 몇 살이 되었겠니. 지금은 삼십 대가 되었지. 중 고등학교 때부터 보고 듣고 했으니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너무 자연스러운 거지, 그들에게는.”


친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보여줬다.


“읽어 봤니?”

난 고개를 저었다.


“최근 뜨는 작가의 책이야. 신기한 게 한번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니, 온통 이런 책만 손에 들어오는 거야. 읽다가 덮었어. 못 읽겠더군. 낯설다 했더니 젊은 애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더라. 그 책 좋은데요, 하면서.

며칠 후 덮어둔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지. 그들과 벽을 쌓고 싶지는 않거든. 읽다 보니 조금 자연스러워지더군. 낯선 것들은 그렇게 시간이 지나 차츰 스며드는지 몰라.

책을 읽으면 이성애자들이 비정상으로 보여. 동성애자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오지. 너무 리얼한 묘사에 나는 작가가 퀴어가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어. 작가 사진을 유심히 쳐다봤지. 선입견인지 모르지만 살짝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있거든. 화가 호크니도 그랬으니까.

평균 수명이 길어진 만큼 출산율은 떨어지고 이제는 ‘비혼’이란 말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세상은 이전에 한 번도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일수록 그런 부분에 더 개방적인 것 같기도 하고.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선택으로 보는 것 같아.”




얼마 전부터 불편한 잔상이 오래가는 영화는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영화는 시간이 흘러도 쉬이 잊히지 않았으니까.


마더(봉준호 감독, 2009), 진실이 당신의 믿음을 배반한다면?




밀양(이창동 감독, 2007), 도대체 누가 그를 함부로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려 하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어쩌면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어두운지 모른다.


두 달 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봤을 때 나는 다시 이런 영화들이 떠올라 뭔지 모르게 불편했다. 모든 진실이 드러났을 때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견해를 존중했고,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곳에 동지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 양 떼에게 돌아가면서 에니스는 이렇게 좋은 시간은 평생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발을 뻗으면 달에라도 닿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이었다.


'달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니⋯.'


유품으로 가져온 잭의 점퍼 위에 에니스는 자기 셔츠를 겹쳐 놓았다. 두 사람이 겪었던 아름다운 시간을 잊어버리면 사랑도 잃게 되므로.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수필과 비평,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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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 백 마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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