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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14. 2020

스님과 신부님

봉수산 아래 두 종교


하늘은 높고 깊었다.


멀리 봉수산의 능선이 한 겹 두 겹 부드럽게 풀어진 실타래 같다. 회색빛 산을 배경으로 어우러진 단풍이 한 폭의 그림이다. 고요한 산과 울긋불긋한 단풍이 소박하면서 아름답다.


단풍은 비슷해 보여도 가까이 보면 다르다. 한 나무에도 여러 색이 들어 있다. 둥치 가까이는 푸르고 가장자리는 붉다. 이미 갈색인 잎도 있다. 많은 색깔이 함께 어우러져 자신을 죽이고 하나가 되었다. 올려다본 단풍이 햇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난다. 위치 따라 방향 따라 단풍은 제각기 다른 색으로 보인다.


봉수산 아래에서 만난 성당과 절의 평화로운 모습이 그림 속 풍경으로 마음에 남았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성당이 있고 성당 입구에 절이 있었다. 절에서 울려 퍼지는 목탁 소리가 성당 앞마당에서 들리고, 성당을 찾아온 순례자들의 성가 소리가 절을 울릴 것 같았다. 두 종교가 오순도순 사이좋게 공생하고 있었다.




목탁소리가 성당을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열린 창으로 화려한 금빛 불상이 보였다. 둘러본 절은 작았지만 온갖 화초로 정원이 오밀조밀했다. 아주 열심인 스님이 사는 절 같았다.

절을 지나 올라가니 지난해 지었다는 성당은 아직 제대로 심은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하기만 했다. 앞마당의 14처(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되새기는 가톨릭의 십자가의 길 기도 조형물) 만이 쓸쓸하게 우리를 맞았다


신부님만 한 분 계신 성당은 창 밖으로 스며든 산의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신자가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한 명 있는데, 옆집 스님입니다.”

신부님이 농담처럼 말했다.


그럴 리가. 의아해하는 우리에게 신부님이 설명해줬다.


스님은 어릴 때 세례를 받았다. 군대에 다녀온 후 마땅한 수입이 없어서 절에 들어가 생업으로 중이 된 스님은 고향에 내려오자 부모가 물려준 땅에 절을 지었다. 얼마 후 지방선거가 있었는데 출마한 사람이 스님을 찾아와 점占을 봐 달라고 했다. 당선될 거라고 예측한 스님의 말이 맞아 한동안 절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절은 그렇게 자리 잡았다.

스님은 소를 키웠는데, 절에 초대받아 간 신부님은 소 냄새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스님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소가 새끼를 낳은 후 송아지를 떼어 놓으면 며칠을 어미 소는 종일 울부짖는다. 날마다 성당까지 들리는 그 소리에 신부님은 정말 괴로웠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스님은 괜찮다고 했다.


“득도한 거지요. 득도가 별 겁니까?”

 다른 종교를 가진 스님과 신부님이 도반 같기도, 형제 같기도 했다.


큰 첨탑과 현수막 나부끼는 도시의 큰 교회보다 소박하고 정겨운 시골의 작은 교회는 사람의 마음을 이상하게 끄는 힘이 있다.

어릴 적 집 옆의 작은 공소公所가 떠오른다. 그곳에서 미사를 드린 기억보다는 마당에 금 그어 놓고 친구들이랑 자치기 하며 놀던 기억이 생생하다. 동네 사람들은 공소의 작은 마루에 모여 앉아 텃밭에서 수확한 농작물을 다듬으며 시시콜콜한 이웃집 이야기를 나누었고, 여름이면 시원한 수박을 겨울이면 뜨끈한 팥죽을 함께 먹었다. 지나가던 스님도 들어와 지친 다리를 쉬어 가고, 길을 묻는 낯선 사람도 찾아드는 공소는 종교와 관계없이 시골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때로는 다른 종교가 새로운 시각을 선물하기도 한다.

19세기 독일의 문호 괴테는 오백 년 전 페르시아의 시인 하페즈의 시를 접하고 동방의 신비스러운 자연과 인간의 순수한 사랑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다.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가 만나 아름답고 서정적인 ‘서동시집西東詩集’으로 태어났다. 후일 이스라엘과 아랍의 젊은이들은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로 종교와 인종의 벽을 허무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는 교리와 율법, 사상을 초월한다. 그러고 보면 모든 종교의 지향은 비슷해 보인다.


“지난번에 성당 앞 14처가 완성되던 날 눈이 내렸는데, 맨 처음 눈 속에서 기도한 사람이 스님입니다.”


스님은 무슨 기도를 했을까?

기도의 대상은 다르지만, 기도하는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신자 없는 외로움과 고독이 등 돌릴 수 있는 두 종교를 친구로 만들어 주었는지 모른다. 아니, 스님과 신부님의 넓은 마음이 서로를 받아들였다. 그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사는 자리를 옮기면 시선이 바뀐다.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일이다. 피부색이 다른 이웃을 받아들이고,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열고, 종교와 정치, 이념이 다른 상대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길가의 나무에 시선이 머문다. 단풍은 붉고 푸르고 노랗고 주홍빛이다. 그 안에도 여러 빛깔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하나 같은 빛깔이 없다. 그러기에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진다. 뜨거운 태양과 세찬 바람에 자기를 비우니 오묘한 빛깔만 남았다. 가을은 절정이었다.





<수필과 비평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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