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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18. 2021

기도

성격이 잘 맞아요


일주일 전,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양말을 신다가 방에서 한 바퀴 굴렀다. 침대 모서리에 부딪힌 머리를 주무르며 나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의자에 앉아서 무심코 뒤에서 부르는 남편을 돌아봤는데 방의 천정 모서리가 도수 맞지 않은 안경을 쓰고 보는 것처럼 휘어 보였다. 누워 있어도 그 현상은 가시지 않아서 남편을 불러서 팔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계속 이러면 밤에 응급실 보내 줘, 남편에게 부탁했다.


내과에서 피검사를 하고 이비인후과에서 여러 검사를 했다. 내과에선 빈혈이 아니라 했고, 이비인후과에선 귀에 이상이 없다 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걷기가 힘드니 산책도 할 수 없었다.


여태 내게 현기증이란 소설 속에만 있는 일이었다. 여주인공이 연약한 모습으로 쓰러지면 곁에 있던 남자 주인공이 득달같이 나타나 부축하는데, 막상 당해보니 이게 그리 우아한 일이 아니었다. 부딪혀서 머리에 혹이 난 것처럼 자칫하면 크게 다친다. 넘어질 때마다 옆에 푹신한 쿠션이나 침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편은 잔소리를 해댔다. "제대로 안 챙겨 먹으니 그렇지."

아내의 건강은 남편의 안정적인 노후 생활과 직결된다. 그러니 내가 비실거릴 때마다 남편은 은근히 불안해한다.


모임 약속을 취소했더니, 친구들이 식사를 한 후 집으로 찾아왔다. 한 친구가 '기' 수련 운동을 십 년 넘게 했다. 친구들과 차를 마시고 난 후 현기증이 나서 소파에 누워있는데 그녀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녀는 손 힘이 무척 세다. 주무르면 피부에 멍이 든다. 그녀가 나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발을 주무르고 예전에 다친 발목이 있는 쪽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뒤로 돌아가 내 뒷목을 주물렀다. 나는 비명을 지르다가, 참다가 했다. '내일이면 보나 마나 멍이 시퍼렇게 들겠지' 그런데 그녀가 주무르기를 멈춘 순간 내가 나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몇 년 전 발목을 다쳤을 때, 굉장히 많이 다쳤고 쉽게 낫지 않겠다는 걸 깨달았던 것과 흡사했다. 이 긍정적인 느낌은 증명해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친구들이 다녀간 후 나는 그녀가 차를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를 치료해주려고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마음이 나를 낫게 한 건지, 그녀의 오랜 수련 활동이 나를 낫게 한 건지 모르지만, 다음날부터 나는 약간의 어지럼증만 남았을 뿐 지구가 도는 느낌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평형을 감지하는 귓속의 돌이 굴러다니다 제자리를 찾아 들어간 것처럼.




다음날 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탓에 잠이 안 왔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보니 며칠 전 지인이랑 전화 통화한 게 떠올랐다. 아들에 대한 생각, 깨달음과 함께.


현기증 때문에 외출을 삼가고 있다고 말했더니, 지인이 몇 달 전 자기도 현기증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저녁 미사를 갔는데 이상하게 머리가 계속 어지러운 거야. 영성체 할 수 있을까 싶었어. 성체를 영하고 자리로 돌아와서 속으로 중얼거렸어. 왜 이렇게 현기증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제발 머리 좀 낫게 해 주세요. 순간 머리가 말개지는 느낌이 들었어. 그리고 어지럼증이 사라졌어. 너무 신기했어. 이거 지금 자기에게 처음 말하는 거야. 그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


지인의 말을 내게서 전해 들은 남편은 "그건 심장이 어느 순간 안정이 되어서지"라고 말했다. 남편은 전날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하더니 현기증의 원인은 ‘심장이 약해서’라는 결론을 이미 내린 터다.

지인의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신자인 친구들은 아무 말 없이 들었고, 종교가 없는 친구는 남편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밤에 지인의 말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는 아들에 대한 내 기도가 생각 나서다.


어느덧 삼십 대 중반이 되는 아들이 결혼할 생각이 없어 보여서, 나는 어떻게 기도할까 계속 고민했다.

어떤 배우자를 만나야 아들이 행복할까?  


공부 많이 한 학벌 좋은 아가씨?

경제적으로 풍족한 아가씨?

옛적 우리 할머니가 늘 말하던 미스코리아 출신 미모의 아가씨?


기도의 지향은 신중해야 하는데, 이것저것 생각해봐도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 두 사람의 성격이 잘 맞아 서로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으면 좋겠다를 기도하기로 했다. 이 생각의 저변에는 남편과 너무 성격이 달라 힘들었던 내 경험이 한 몫했다. 성격이 잘 맞아 싸우지 않고 알콩달콩 사는 부부들이 늘 부러웠다. 오래 같이 살다보니 이젠 나와 다른 점도 장점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리고 덧붙여 생각과 가치관이 건전하고 몸이 건강한 아가씨이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성격 잘 맞는 아가씨, 영과 육이 건강한 아가씨를 아들이 만나게 해 주세요!"


기도했다고 말하지만, 어느 한 때처럼 매일 일정한 시간 십자가 앞에 앉아서 기도하고, 미사 시간마다 억지로 생각을 꺼내서 기도한 건 아니었다. 아들이 떠오를 때마다, 결혼을 걱정할 때마다 이렇게 바랐을 뿐이다.

절실하게 원하고, 자주자주 기억하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 때 욕심으로 가득 차 불처럼 뜨겁게 매달렸던 시간이 지나니 기도는 그런 것 같았다. 아무리 원해도 내 지향이 하느님의 뜻에 맞아야 했다. 내 기도는 조금 성숙해졌는지 모른다.




이 주 전, 우리 부부는 서울에 가서 아들의 여자 친구를 만나고 왔다. 만난 지 2년이라 했다. 식당에 들어오는 아가씨의 첫인상이 맑아보였다. 하지만 하룻저녁 함께 식사하고 헤어졌으니, 나는 그녀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었다. 떨어져 살고 아이들이 워낙 바쁘니 만나기도 힘들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녀에 대해 좀 자세히 알고 싶은데….


그래서 며칠 전 아들에게 전화하면서 농담처럼 물었다.


-여자 친구의 어떤 점이 좋으니?

-성격이 잘 맞아요.


잠을 청하다 문득, 그간 내가 한 기도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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