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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24. 2021

붉은 책과 알자스 로렌 지방

분쟁 지역이 평화의 모태가 되다

오래전,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책을 낱권이 아니라 전집으로 구입했다.


외판 사원들이 을 들고 집집을 방문했다. 책 사려! 외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한 달에 한 번 집으로 찾아왔다. 목돈을 내고 사는 사람이 없었으니 할부 값을 받아야 했고, 그럴 때마다 또 다른 책을 슬그머니 내밀어 어머니가 지불해야 하는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덕분에 내 유년 시절은 풍성다.


Sns에 어릴 때 읽은 계몽사 120권 책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재빨리 댓글을 달았다.

"그거 빨간 책 맞죠?"

 

책은 붉은 바탕에 샛노란 나무 덩굴무늬가 오글오글하게 들어있는 표지로 50권 정도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기억은 모두 너무나 희미해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기억이란 얼마나 불확실한지. 대학시절 서클을 함께 다닌 친구들을 만나서 산에 캠핑 간 이야기를 나눴을 때 친구들이 기억하는 일들은 모두 달랐다. 우리가 함께 간 게 맞나 할 정도로.

어두운 산길을 걷다가 길을 잊어버려서 아이처럼 울면서 걸었다. 너무 창피해서 얼마 후 서클을 그만뒀는데, 친구들은 아무도 그때 내가 울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붉은 책’이란 댓글에 모두 옛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그 책이 50권이었다는 설과 120권이었다는 설이 비슷한 비율로 올라오기시작했다. 거의 50년 전 일이니 희미해진 기억을 붙잡느라 애써도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책은 얼마 후 우리 집에서 사라졌다. 형편이 어려운 어머니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집에 물건을 팔러 자주 오곤 했다. 그릇이나 미제 물건 같은 것들.

그 집 아들이 나와 나이가 같았다. 우리 집에서 내가 읽던 책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그 집으로 갔다. ‘프랜다스의 개’, ‘소공녀’, ‘마지막 수업’. 붉은색 표지의 계몽사 전집과 ‘삼총사’가 들어있던 열다섯 권짜리 하얀색 전집.


중학생이었던 어느 날, 친구 어머니가 그 애를 데리고 우리 집을 방문했는데 나는 뜬금없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얼마나 난감했을까. 집을 찾아온 모자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런 이상한 행동을 나는 지금도 설명할 수 없다.

대학 1학년 어떤 모임에서 그 애를 다시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무척이나 인간관계가 서툴고 미숙했다. 함께 읽었을 책 이야기만 했어도 우리는 좋은 추억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사춘기를 별스럽게 보낸 탓에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놓쳐 버렸다. 나를 어떻게 여겼을까? 상처받았을 것 같다.




갑자기 붉은 책을 떠올린 건 계몽사 전집 때문이지만, 전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쉬망(1886~1963)’소식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고향이 라인강 유역의 알자스 로렌지방이다. 붉은 전집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책은 프랑스 작가 알퐁소 도데(Alphonse Daudet·1840~1897)의 ‘마지막 수업(1873)’이다. 천방지축 개구쟁이 소년이 겪었던 평범한 어느 날의 낯설고 무거운 수업시간.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날 아침 나는 학교에 가는 시간이 늦었다. 아멜 선생님은 그 전날 동사에 대해 질문하겠다고 하셨는데 친구들과 노느라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아 꾸중을 들을까 몹시 두려웠다. 차라리 수업을 빼먹고 들판을 쏘다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맑고 화창한 날씨였다.”


학교 시계가 낮 12시를 알리고 병사의 나팔소리가 들리자 선생님은 말없이 분필을 집어 들고 칠판에 크게 글씨를 썼다. “프랑스 만세 (Vive La France)!"


이 단편의 배경이 된 곳이 로베르 쉬망의 고향이기도 한 알자스 로렌 지방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 지역인 이곳은 수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프랑스의 영토였다가 독일의 영토가 되었다. 10세기에는 샤를마뉴의 영토 확장으로 신신성로마제국에병합되었고, 유럽 최대의 신구 교도 간 종교 전쟁이었던 30년 전쟁(1618~1648) -사망자가 800만 명이 넘었던 잔혹한 전쟁 -후에는 프랑스 땅으로, 보불(普佛) 전쟁(1870~1871) 후에는 독일로 넘어갔다. 1차 세계대전(1918) 후 프랑스로, 2차 세계 대전(1940)이 일어나자 독일에 다시 합병되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1944년) 후 프랑스 영토가 되자 많은 주민들이 반역자로 처형됐다. 국적은 프랑스이지만 자신을 독일인으로 여겨 자원 입대한 이들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200년간 알자스 로렌 주민은 국적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가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열 여덟 번이라는 설도 있다.


이곳은 철광석과 석탄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서 두 나라가 포기할 수 없없는지역이었다. 풍광이 중세 동화 속처럼 아름다워 후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로베르 쉬망(Robert Schuman)은 로렌 출신의 아버지에 의해 독일인으로 태어나 이 에서 공부했고 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인으로 바뀌었다. 프랑스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정계에 발을 내디딘 그는 프랑스 외무장관일 때 유럽 5개국이 참여하는 유럽 석탄 철광석 공동체(ECSC)를 제안했다(쉬망 선언, 1950년).


 ESCS는 철강업의 공동시장을 개설하고 관세를 폐지했다. ESCS는 현 EU의 기초를 닦은 기구라 할 수 있다.


분쟁의 진원지였던 알자스 로렌이 유럽 통합의 씨앗이 된 셈이다. 로베르 쉬망은 마차 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후 종교적인 삶에 귀의했다. 사람들은 그를 ‘유럽의 아버지’로 부른다.


교황청이 로베르 쉬망의 ‘영웅적 성덕(heroic virtue)’을 인정하는 내용의 교령을 발표하고  ‘가경자’의 칭호를 수여했다. 가경자는 가톨릭 성인(聖人)에 오르는 첫 관문이다. 가경자가 기적 심사를 통과하면 ‘복자’가 되고, 이후 기적이 한 번 더 인정되면 성인의 반열에 오른다.

가톨릭은 로베르 쉬망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유렵 평화의 기틀을 잡은 노력을 가치 있게 평가했다.


붉은 동화책 때문에 떠올랐던 ‘마지막 수업’이 알자스 로렌 지방의 파란만장한 역사로, 참혹한 분쟁지역을 평화의 모태로 승화시킨 가경자 로베르 쉬망으로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생이었던 소설가 이병주가 일본인 교장 부인에게서 ‘마지막 수업’을 선물 받고,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알자스와 로렌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처지이고, 우리나라도 그곳처럼 슬픈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

책은 이전에 생각지 못한 것들을 깨닫게 한다. 세상의 일들이 단순하게 선과 악으로 구분될 수 없다는 것. 낯선 것을 밀어내는 건 싫어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 때때로 사람들은 본인도 이유를 알지 못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


#가경자로베르쉬망

#마지막수업

#알자스로렌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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