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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27. 2021

사랑하기에 외로운 사람들

카슨 매컬리스의 소설



장영희 교수에 관한 글을 읽다가 그녀가 소개한 카슨 매컬러스의 책을 두 권 연이어 읽게 되었다. 『슬픈 카페의 노래(The Ballad of the Sad Cafe)』(1951)와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The Heart is a Lonely Hunter)』(1940).


카슨 매컬리스는 15세에 발병한 류마티스성 열병을 시작으로 결혼과 알코올 중독, 이혼과 재결합, 남편의 질투와 자살, 수차례의 뇌졸중과 유방암을 겪었고 결국 오십 세에 병으로 사망했다. 른 살 초반에 이미 걷기도 힘든 상태여서 휠체어에 앉아서 하루에 한쪽씩 글을 써나갔다. 그녀에게 글을 쓰는 행위는 무엇이었을까?

책을 번역한 장영희 교수를 생각하며 나는 소아마비와 암으로 평생 비슷한 고통을 안고 살았던 그녀가 매컬리스에게서 일종의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어떤 희망을 가지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짐작했다.


『슬픈 카페의 노래』는 장 교수가 2002년 서강대학교 대학원 텍스트로 채택한 교재이다. 154쪽의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사랑을 주제로 한 내용은 무겁고 진지하다. 학생들이 각자 맡은 부분을 번역해 와서 비교하고 토론했다. 장 교수는 전 해에 유방암이 발병했다. 옮긴이의 글에서 장 교수가 말한다.

“학생들과 나, 언젠가는 죽을 운명인 열두 명의 인간들이 이 책을 번역하며 사랑의 족쇄를 차고 희열과 고통을 함께 하며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어떤 구획에 집어넣으려는 습성이 있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그런 식으로 분류할 수 없었다. 잔인한 범법자였다가 인생의 어느 순간 사랑에 빠져 그에게 있을 법하지 않은 착하고 순진한 면을 드러낸 마빈 메이시. 이웃과 불화하고 빚 받아내는 데 혈안이 된 수전노이면서 의외로 환자를 치료할 때는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최대한 배려하는 미스 어밀리어. 그리고 자상하지만 교활한 꼽추 라이먼.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 지를 수 있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


『슬픈 카페의 노래』도입부에 실린 구절이다.  


책은 사랑으로 시끌벅적했던 카페가 사라진 황량한 마을 모습으로 시작한다. 시간은 과거로 되돌아간다.

사팔뜨기이며 남자 같은 골격을 가진 미스 어밀리어에게 어느 날 꼽추 라이먼이 찾아온다.


“미스 어밀리어는 천천히 이 이상한 나그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길다란 손가락으로 꼽추의 등 혹을 가만히 건드렸다. 꼽추는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지만 조금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밤은 고요했고 달은 여전히 부드럽고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점점 싸늘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때 미스 어밀리어가 좀처럼 하지 않던 일을 했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술병 하나를 꺼내어 손바닥으로 병 입구를 쓱 문지르더니 꼽추에게 마시라고 건네준 것이었다. 어밀리어는 외상으로 술을 파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한 방울이라도 공짜로 술을 준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p21


사랑은 번갯불처럼 찰나에 이루어져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 탄생했다. 그들의 마음에 무엇이, 왜, 일어났는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사랑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미스 어밀리어는 꼽추 라이먼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 듣는 라이먼은 관심 있는 주제가 나오면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어밀리어가 꼽추 라이먼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는 단 하나, 마빈 메이시와의 열흘간의 결혼 생활뿐이었다.


등장인물은 평범하지 않고, 이들의 삶도 변덕스럽고 우스꽝스럽다. 이상하고 괴기스럽다. 하지만 누구나 이런 면, 한두 가지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깨달음이 다가오면 이전처럼 사랑을 함부로 규정짓지 못하게 된다. 좁고 팍팍했던 마음자리가 조금 넓어진다. 그녀의 다른 소설을 살펴보자.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The Heart is a Lonely Hunter)』에는 두 농아가 나온다. 존 싱어와 그리스인 아토나풀로스. 이 책을 나는 영화로 먼저 보았다. 영화에서 두 농아는 수화로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감독은 그들의 대화에 어떤 자막도 보여주지 않았기에, 나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 했다. 세상은 그들을 중심으로 움직였고, 시청자들은 주변인이 되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그처럼 순식간에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감독은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시각적 이미지를 제공하는 영화와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책은 둘 다 나름 장점이 있지만, 늘 그렇듯 책은 영화보다 더 많은 걸 담을 수 있다.


"그 소도시에는 벙어리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늘 같이 있었고 아침이면 일찍 집을 나와 팔짱을 끼고 일터로 걸어갔다. 두 친구는 서로 매우 달랐다. 언제나 앞장서는 이는 꿈꾸는 듯한 표정의 뚱뚱한 그리스인이었다. 그는 여름이면 노란색이나 초록색 폴로셔츠를 입었는데, 앞자락은 바지 속에 아무렇게나 넣고 뒷부분은 밖으로 늘어뜨렸다. 날씨가 더 추워지면 헐렁한 회색 스웨터를 그 위에 껴입었다. 둥근 얼굴에는 기름기가 흘렀고 눈은 반쯤 감겨 있었으며, 입술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채 멍청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또 다른 벙어리 한 명은 키가 컸다. 두 눈은 예민하고 지적이었고, 항상 빈틈없이 단정하고 차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p111


섭식 장애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그리스인 친구가 정신병원에 수감되자 싱어는 홀로 생활하게 된다. 차츰 마을 주민들이 싱어를 찾아온다. 싱어는 그들의 입을 읽고, 말하는 내용을 이해한다. 진보적 인텔리 비프 블런트, 가난을 극복한 흑인 의사 코플랜드, 음악을 좋아하는 사춘기 소녀 믹, 다들 싱어를 찾아와 자기 이야기를 한다. 싱어는 묵묵히 듣고 이따금 간단한 글을 메모지에 써서 의사를 표현한다.

그들을 관찰하던 카페 주인 패터슨은 점차 사람들이 싱어의 뒤를 따라 걷는 걸 목격한다. 그는 싱어가 그들의 ‘신’ 이 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생각을 들어주고 이해해 주는 이가 없으면 마음속에 분노가 쌓인다. 우매한 이들보다 지식인들이 더 분노에 차 있다.


“코플랜드 박사에게 필요한 것은 자제력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그 어둡고 끔찍한 감정들이 되살아나 그의 영혼과 싸웠다. 며칠 동안 증오가 그를 죽음의 영역으로 침몰시켰다. 한밤중의 방문객. 블런트 씨와의 싸움 후에 그의 내면에는 살인적인 어둠이 드리워졌다. 그러나 지금 그 싸움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기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윌의 뭉툭해진 다리를 볼 때 그의 속에 또 다른 분노가 일어났다. 사랑과 증오의 전쟁, 흑인들을 위한 사랑과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에 대한 증오, 그것이 그를 탈진시켰고 영혼을 병들게 했다.” p408


이런 대목이 나는 낯설지 않았다. 부조리한 사회, 잘못되어가는 정치, 권력을 가진 자들의 횡포에 대한 분노는 많이 듣고, 읽고, 관심을 가질수록 깊어졌다.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말다툼을 하고 갈라섰다. 말하는 이는 많지만 듣는 이는 없었다.


종교를 가지려 하고, 사제와 목사를 찾아가 고해하고, 상담가와 정신과 의사를 만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았다. 들어주는 이 없는 외로움이 사람들을 분노하고 과격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쉼 없이 SNS에 거친 말들을 쏟아내는지 모른다. 현실에서 만나면 절대 그러지 않을 점잖은 사람들조차.


싱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찾아온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만, 소통할 수 없었다. 글로 의사를 표현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수화로 소통했던, 유일하게 자기의 말을 들어주고 이해해 주던 그리스인 친구가 죽자 싱어는 절망하고 만다.

현대인의 외로움에 대해 쓴 이 걸작은 놀랍게도 매컬리스가 23세에 쓴 첫 소설이었다.





『슬픈 카페의 노래』 중반에 매컬리스의 '사랑론'이 두 쪽 넘게 이어진다.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은 두 사람의 공동 경험이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에 오래도록 쌓여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영혼 깊이 느낀다. 이 새롭고  이상한 외로움을 알게 된 이들은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사랑을 주는 이들은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자기 내면에 머무르게 해야 한다. 이 사랑의 대상은 누구든 될 수 있다. 아이든 어른이든 남자든 여자이든.

사랑을 받는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의 불을 지를 수 있다. 사랑을 주는 사람도 분명히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는 그의 사랑에 추호도 영향을 미치지 앉는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도 격렬하고 무모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랑이든지 그 가치와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p50~52


매컬리스는 사랑은 주고받는 상호적 경험이 아니라 혼자만의 것이라 한다.  '신' 외에 누구도 두 사람의 사랑을 심판할 수 없다. 그러기에 사랑은 고통을 수반한다. 외로움을 심화시킨다. 장 영희 교수도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는지 그대로 발췌해  뒷부분에 옮겨 놓았다.



#슬픈카페의 노래, 카슨 매컬리스, 장영희 옮김, 열림원

#마음은외로운사냥꾼, 카슨 매컬리스 지음, 서숙 옮김,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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