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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l 10. 2021

아빠는 노바디(Nobody)

노바디(Nobody), 일리야 나이슐러 감독, 밥 오덴 커크 주연


딸과 사위, 손자들과 제주도로 가족 휴가를 다녀온 다음 날, 나는 남편과 TV로 영화 <노바디(Nobody)>를 봤다.


전날 저녁 우리는 여행 뒤풀이로 맥주를 나눠 마셨다. 안주는 간단하게 소시지를 준비했는데, 남편이 달걀 타령을 하기에 달걀도 하나 구웠다.

아이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겠다며, 요리 강습을 받았던 남편은 휴가지에서 아이들에게 달걀을 구워줬다. 달걀 한 줄을 사서 첫날 여섯 개, 둘째 날 네 개를 부쳤는데, 집에 와서 "마지막 날, 나도 달걀을 먹고 싶었어"라고 고백하는 바람에 나는 웃음이 풋! 터지고 말았다.

하지만 젊잖아 보이는 박완서 작가도 부엌일 마치고 오니 남편이 굴비를 엽렵하게 발라 먹고 생선 가시만 남겨 놓았다고 불같이 화를 냈다지 않은가.


수년 전, 성당의 레지오 단원이었을 때 나는 떡 한쪽 때문에 레지오를 탈퇴한 전력이 있다. 레지오 단원들이 성당 대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나는 선약이 있어서 마치기 5 분 전쯤 성당을 빠져나가야 했다.

나보다 앞서 사람들이 떡을 하나씩 받아서 나가고 있었다. 내가 나가려는 순간, 감독하던 레지오 단원이  마치기 전에는 떡을 나누어주지 말라고 수녀님이 지시했다며 떡 상자 뚜껑을 탁 소리 나게 내 눈 앞에서 닫아 버렸다.

이는 오랫동안 같이 레지오 활동을 했던 우리 레지오 단원이었다. 바로 앞사람이 떡을 받는 장면을 목격했기에 나는 무안했고, 무척 마음이 상했다. 그 사람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후일 레지오를 그만두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는 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받아오면 굴러다니다가 버리기 일쑤였음에도 불구하고. 떡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수년을 같이 봉사 활동을 해온 '사람'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


남편도 달걀이 중요했던 건 아니었으리라.

다들 아기챙겼으니 은연중에 서운했던 부분이 있었을 것 같았다. 부모로서 권위와 무게를 잡을 것인가, 허물없는 친구같은 관계가 될 것인가.


휴가를 다녀온 저녁, 달걀 프라이 한 개가 맥주 안주로 등장하게 된 이유다. 서운해 하지 마시구려. 당신은 내가 챙겨줄게. 물론 이렇게 하진 않았다.




남편은 수십 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바깥의 일을 집에 와서 이야기하는 법이 일절 없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직업을 막연하게 알았던 것 같다.

지난달에 남편이 제작에 관여한 배에 관한 뉴스를 봤다. 그것도 둘이서 밥을 먹던 중 남편이 벌떡 일어나 TV 앞에 다가가 보는 바람에 알게 됐다.

“걱정했는데, 잘 됐어.”


-아빠가 설계한 배야.

슬그머니 가족 카톡방에 관련 기사를 올렸다. 아이들이 열심히 살아온 아빠에게 긍지를 가졌으면 했다. 남편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멋지네요.

카톡방에 글을 잘 올리지 않던 사위가 모처럼 말했다.


-37년 인생 동안 처음으로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실감했어.

딸이 말했다.


-우와우아아...

며칠이 지나서야 아들이 기사를  모양이다.


영화 <노바디>에서 사람들은 허치 맨셀을 무시한다. 총을 들고 집에 침입한 도둑에게 대들지 않았다며. 가족, 경찰, 이웃, 모두 그를 용기 없는 무력한 남자로 본다.


-어떻게, 골프채를 한번 휘둘러보지도 않았어요?

경찰이 나무라듯 그에게 물었다.


아들이 다칠까 봐 허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 허치는 그간 억눌렀던 본성이 되살아났다.


모든 일이 끝난 후 변호사가 묻는다.

ㅡ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ㅡ노바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죠.


영화를 보는데, 뒤에서 남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ㅡ허허허. 완전히 서부영화구먼.


가족을 양육하느라 사회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온 남자가, 야성을 마음껏 발휘하는 남자를 보며 즐거워했다. 현실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란 걸 알면서도.



#노바디(Nobody), 일리야 나이슐러 감독, 밥 오덴 커크 주연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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