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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17. 2020

‘은유의 힘’에서 울라브 하우게를 만나다

은유, 낯설게 보기


애절한 사랑에 빠져 밤새 헤매다, 가방을 넣어둔 락카를 찾지 못해 승객이 모두 내린 비행기에서 도와 달라 외치다 깨어나니 한바탕 꿈이었다.


다행이라 가슴을 쓸어내리고 머리맡을 보니 간밤에 읽다 엎어둔 책이 있다. 난해한 시의 미로를 헤매다 지쳐서 잠든 탓인지 모른다.


시인은 견자見者다. (…) ‘본다’는 것은 지각의 단초가 되는 행동이다. (…) 시인이 드러내는 지각의 특이성은 항시 다르게 보기, 낯설게 보기의 결과로 나타난다. p86


나의 첫 글쓰기 선생님이 늘 강조한 말씀이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며 ‘낯설게 보기’를 해야 한다.”


낯설게 보기라… 그게 뭔가, 한동안 입에 물고 다니며 고민했다.  


작가는 말한다.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대상과 은유 사이가 벌어질수록 은유의 효과는 커진다. 틈이 생긴다는 것은 낯설게 함을 전제로 한다. 은유가 망상은 아니지만 수수께끼는 될 수 있을 테다.




어느 날 갑자기 시가 내게로 왔다. 내가 시를 찾은 게 아니었다. P190


시인들은 다들 그런 말을 한다. 오래전 시집인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 시인도 시는 그냥 다가오는 거라 말했다. 그때는 마구 마구 시가 다가왔다며. 이제 다시는 그런 시를 쓸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런 비슷한 느낌을 나도 언젠가 맛본 적 있다. 빨리 잡아채지 못해, 기록하지 못해 사라졌을 뿐. 몸으로 느끼는 걸 쓰지 않고 머리로 쓰기 시작하면 시는 사라져 버린다.


아무리 어려운 책에서도 한 줄기 빛을 본다,라고 말한다면 이 책을 너무 심각하게 소개하는 것이리라. 나는 마음을 비우고 단순하게 읽으려 노력한다. 시가 눈길을 끌면 그곳에 한동안 머문다. 울라프 하우게는 내가 처음 접하는 시인이다.


언덕으로 들어가,
거기 대장간을 지어라,
거기 풀무를 만들고,
거기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고 노래하라!

 -울라브 하우게,「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 」


난해한 시를 붙들고 무슨 뜻인지 알려고 머리를 쥐어뜯기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읽는다. 게다가 시에 대한 공력이 짧은 나에게 시인이 친절하게 한 줄 제목으로 시를 설명해주니 어찌 좋지 아니한가.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나의 갈증에 바다를 주지 마세요.
빛을 청할 때 하늘을 주지 마세요.
다만 빛 한 조각, 이슬 한 모금, 티끌 하나를,
목욕 마친 새에 매달린 물방울같이,
바람에 묻어가는 소금 한 알같이.

-울라브 하우게,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전문


정말 좋은 시인은 “진실의 전부”가 아니라 사막의 전갈이나 거미의 먹이사냥같이 진실의 작고 구체적인 조각만을 갈망한다. 왜냐하면 “진실의 전부”는 너무나 커서 시의 그릇에 담는 게 불가능한 탓이다. 시는 진실의 작은 부분들, 세상을 뒤덮은 소음과 혼잡도 꺼트릴 수 없는 작은 촛불의 숨결, 악취 속에서 홀연히 노란 장미의 향기 한 점으로 충분하다. 시가 머금은 진실의 조각들은 아무리 작아도 그것이 세계를 향해 발신하는 신호는 미약하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라고 노래할 수 있다.  171~172p




이젠 까마득한 옛날 일 같지만 2015년 북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 가는 곳마다 탄성을 지르는 우리들에게 여행을 안내하던 제법 나이 든 가이드가 말하길 “돌아가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노르웨이일 겁니다.” 했다. 노르웨이의 자연만큼 멋지고 신비로운 게 없다며.




화살이 과녁을 맞추려면
이리저리 둘러갈 순 없다. 하지만 좋은 궁수는
거리와 바람을 수락한다.
그러니 네가 과녁을 때 나는 조금 위를 겨눈다.

-울라브 하우게, 「조금 위를 겨눈다」 전문





노르웨이의 풍광 탓일까? 시인의 독특한 이력 탓일까? 유독 울라브 하우게의 시가 가슴에 와 닿은 것은.



하우게는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농업학교를 나와 전문 정원사 노릇을 하며 시를 썼다. 그는 노르웨이 서부지역인 울빅을 떠나 산 적이 없다. 이 장소에의 고착은 어려서 정신 질환을 앓은 것과 상관있을 테다. 나고 자란 고향 땅에 머무르면서 묵묵하게 정원사 일을 하며 시를 쓰고 시집을 펴낸 하우게는 1994년 고향 울빅의 집에서 제 의자에 앉은 채 평화롭게 죽었다. 사람들은 하우게를 노르웨이의 국민 시인으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
그는 ‘매일 시 한 편을 쓰고 싶다 “고 소박한 갈망을 표현한다. 시는 엄청난 영감이나 고매한 착상이 아니라 날마다 ”떠오르는 생각, 일어난 일, 무언가 주의를 끄는 것“에서 시작한다. (…)
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데는 사소한 사건이 일어나는 찰나를 목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시는 그토록 작은 진실만을 머금기 때문이다. 173p


하늘로 난 창, 별과 계곡의 눈얼음이 쏟아져 내린 밤



시인은 자기 세계의 한 복판에서 산다는 점에서 농부다. 어디에 살든지 농경시대의 농부들은 대지의 자식들, 기후의 예측자들, 씨앗의 수호자들이다. 그들은 자연 세계의 중심에서 제 삶을 꾸리는 탓에 ‘풍경’의 중심을 꿰뚫어 본다. (…) 보통 사람들은 그 모름 속에서 혼란에 빠질 수도 있지만 농부들은 모르는 것 속에서 사라지는 세계의 모든 사물에 감응하고, 그것을 감각적 명증화 속에서 포착해낸다. p85~86


작가는 이 책이 오롯이 시에 관한 책이라고 서문에서 밝힌다. 책은 일종의 시인 예찬 같았다. 작가가 소개한 많은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끝까지 읽을 수 있게 책은 나를 잡아당겼다. 은유의 힘으로.


삶이 끝날 때
나는 말하고 싶다
평생 나는 경이와 결혼한 신부였노라고.
평생 나는 세상을 품에 안은 신랑이었노라고.

-메리 올리버, 「죽음이 찾아오면」 부분





#은유metaphor의 힘, 장석주 지음, 다산책방

#울라브 하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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