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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Nov 06. 2021

아까시나무 집

수필과 비평 2021년 11월

  

  “아, 아까시나무다!”


  하얀 꽃이 소담스레 핀 나무를 본 건 아파트 뒤쪽 길이었다. 차의 속도를 늦추며 나는 재빨리 차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럴 리 없어. 사라진 게 언젠데. 이제는 어디서도 아까시나무를 볼 수 없어. 나는 차를 세우고 나무를 찬찬히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새로 이사 간 집은 마을 초입에 있었다. 담임선생은 걱정스레 물었다. “그곳에서 어떻게 학교를 다닐 거니?”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였다. 초등학교 4학년 봄이었다.  


  잔뜩 부푼 하얀 꽃을 주렁주렁 매단 나무가 담을 가렸다. 아까시나무를 하나, 둘, 셋, 헤아리며 지나가면 파란색 철 대문이 나왔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나무 사이에 쪽문이 있었다.  

둥치를 껴안으면 손끝이 맞닿지 않았다. 검은흙 위로 드러난 뿌리는 옆으로 뻗어 나무와 나무를 단단히 이어주고 있었다. 나무는 고목처럼 컸다. 봄이면 하얗고 부드러운 향기가 바람을 타고 집으로 흘러들었고, 여름이면 무성한 잎이 길 위에 짙은 그늘을 만들었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었다. 치르르 치르르.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아까시나무 집 아이’라 불렀다.  


  바깥에서 클랙슨이 울렸다. 아침밥을 먹다가 우리는 후닥닥 뛰쳐나왔다. 집 앞에 버스가 서 있었다. 가방을 메고 들고, 언니는 교복에 붙일 하얀 칼라를 들고 탔다. “이 차 놓치면 지각이잖아. 빨리 나와야지.” 기사 아저씨의 나무람에 모두 머리를 긁었다. 사람들이 웃으며 우리를 쳐다봤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두 살 터울의 다섯 아이.


  그 버스를 타고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첫 해에는 두 살 아래 남동생이, 다음 해에는 막내까지 나를 따라다녔다. 버스는 늘 붐볐다. 도저히 탈 수 없을 것 같아도 버스 차창은 꾸역꾸역 사람들을 밀어 넣었다. 커브를 돌 때마다 기사는 묘기 부리 듯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신기하게 다음 정류장에 도착하면 사람들을 더 태울 수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기 두 세 정류장 전부터 나는 동생들을 일으켜 세웠다. 손과 손을 이어서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갔다. 정류장을 지나치거나, 나만 내리고 동생들은 내리지 못하는 상상을 하면서.


  몇 달 전 친정에 다녀올 때 나는 동생과 같은 기차를 탔다. 표를 각자 끊었기에 좌석이 다른 칸이었다. 동생 칸에 가서 좌석을 확인하고 내 좌석으로 오면서 나는 옛 생각이 나서 혼자 웃었다. 나이 쉰이 넘은 동생이 좌석을 못 찾을까 봐 이러나 싶어서.


  장대비 퍼붓던 날, 학교 앞에서 차장이 엉거주춤 내리는 동생의 등을 손으로 밀어버렸다. 우리는 도미노처럼 엎어졌다. 버스는 떠나고, 우리는 망연자실 흙 묻은 옷을 서로 바라봤다. 손으로 털어도 진흙은 번져만 갔다. 슬프고 난감했던 날. 집에서 십 분 거리에 마을 초등학교가 있는데. 교실에서 짝인 남자애는 나를 ‘시골 애’ ‘촌년’이라고 부르며 놀렸다. 바로 전 해 이웃에 살았던 나를. 마음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왜 우리를 전학시키지 않아?”  


  물었을 때, 엄마는 좋은 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엄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지 모른다. 그 무렵 엄마는 무척 바빴으니까.   


  여름이 되자 집 앞의 개울이 우리를 불렀다. 물은 차갑고 맑았다. 바닥에 깔린 갈색, 검정 돌이 그대로 물 빛깔이 되었다. 수영복을 입고 나온 우리를 마을 아이들은 낯설어했다. 하지만 물놀이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주었다. 아이들에게 개헤엄을 배웠다. 두 손으로 물을 앞으로 긁으며 발로 물장구를 치면 저만치 앞에 있던 다리가 어느틈에 뒤에 가 있었다. 산 아래 큰 바위 둘레는 물 빛깔이 달랐다. 키 큰 남자아이들이 호기롭게 바위에서 뛰어내렸고, 그럴 때마다 물 폭탄이 쏟아졌다.


  뜨거운 햇빛에 자갈이 하얗게 바랜 날, 개울가에 한 남자애가 누워있었다. 아이는 하늘과 햇빛을 보지 못하고 바람을 느끼지 못했다. 뜨거운 햇살에도 아이는 파리하게 추워 보였다. 한동안 우리는 개울에 나가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자 모든 게 전과 같아졌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물장구 소리, 웃는 소리, 아이들의 고함으로 개울가는 시끌시끌해졌다.   


  병풍처럼 비스듬히 펼쳐진 산이 개울과 우리 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집에 올 때면 골짜기를 넘어가는 햇살이 우듬지에 여운을 남겨 계곡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군인들이 자주 그곳에서 훈련을 했다. 골짜기에 긴 로프를 걸어놓고 산을 올라갔다. 붉은 모자를 쓴 조교들이 기합을 넣었다. 아까시나무 밑을 달리는 군화 소리, 호각 소리를 들을 때면 나는 뭔지 모를 기운이 느껴져 젊음이란 이렇게 강하고 활기찬 건가, 그들이 지나가는 인생의 어느 한 시기가 무척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세월이 지나 내가 그 시기를 맞았을 때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불안정했는데.


  대학에 입학하면서 나는 집을 떠났다. 방학이 되어 집에 가면 아까시나무는 둥치가 조금 더 굵어졌고, 동생들의 턱밑은 거뭇거뭇해 있었다. 얼마 후 나는 결혼했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우리 집이 있던 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섰고, 아까시나무는 사라지고 없다. 가족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받아들이기 싫고 지우고 싶었던 그 시기가 내 아동기였고, 그  시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다리는 지금도 그대로 있다. 산도 마찬가지다. 강물은 전과 달라졌다. 물줄기는 가늘어지고 혼탁해져서 이제는 아무도 그 물에서 수영하지 않는다. ■


<수필과 비평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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