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인 Jun 24. 2020

엄마가 요양병원에 들어갔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던데


“아무래도 요양병원 보내야겠어.”

한 달 전 남동생이 전화했을 때 이제는 버티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처음 꺼낸 말이 아니었으니까.


2,3년 전에도 동생은 밤에 엄마가 당뇨 쇼크로 죽을 뻔했다며 도저히 못 모시겠다 한 적 있다. 떨어져 사는 내가 알기로 그런 경우가 벌써 몇 번이니 그동안 동생이 소소하게 가슴 쓸어내린 건 얼마나 많을까.


우린 오 남매지만 모두 흩어져 산다. 서울 대전 부산. 큰 남동생만 엄마 곁에서 살았다. 어찌 보면 엄마가 아들 손을 놓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동생이 이혼하게 된 원인이 딱히 엄마 때문은 아니겠지만,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고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동생이 자주 엄마 집에 드나들다 보니 부부 사이가 틀어졌다. 깊은 속사정은 모르지만, 내가 알기론 그렇다. 아내와 헤어지고 난 후에도 동생은 갈등의 원인이 된 엄마랑 금방 같이 살지는 못했다. 아내와 자식들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오 년 전 당뇨병이 심해진 엄마가 혼자 식사를 챙기지 못하게 되자 그날부터 남동생이 엄마를 부양하게 되었다.

그동안 엄마는 넘어지고 쓰러지는 자잘한 사고를 많이 겪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쇠퇴했다. 바깥출입이 줄자, 인지 능력이 확연히 떨어졌다. 여든이 넘어서까지 신문을 구석구석 꼼꼼히 읽던 엄마가 집 밖을 나가지 못하게 되자 종일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루 한 번 찾아와 세 시간 정도 머무는 요양사 아주머니만 말벗으로 삼게 되었다.


“아이고, 네가 어떻게 아기를 키우냐.”

얼마 전부터 만날 때마다 엄마는 내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손자를 돌봐주게 되었다는 말을 예전에 한 번 했을 뿐인데.


“이젠 안 키워. 아기 서울 갔어.”

몇 번이나 말해도 엄마는 “그래?” 하고는 돌아서면 같은 걱정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긴 재산은 거의 없었다. 살고 있는 아파트 한 채뿐. 남동생이 엄마를 모시면서 집의 크기는 자꾸 줄어들었다. 좋지 않은 형편에 동생도 자식 혼사를 치러야 했다. 지금 사는 작은 빌라로 옮겼을 때 엄마는 잠시 정신이 돌아올 때면 화가 났던 거 같다. 오랜만에 찾아온 내가 누운 엄마를 빼꼼히 들여다보고 가겠다 말했을 때,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내 손을 끌어 잡아당겼다. 난 조금 으스스했다.

“넌, 절대로 믿지 마라. 아무도.”


집에 돌아오면서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곰곰 생각했다. 요즘은 어렴풋이 그 뜻을 알 것 같기도 하다. 나이 들어 이사를 하게 되면 모든 인연이 끊긴다.

요즈음 재산 증여 문제로 떠도는 우스개가 있다. 일찍 주면 굶어 죽고, 늦게 주면 맞아 죽는다나.




남동생이 엄마 돈을 꿰차고 관리하게 된 건 어느 날 엄마가 은행 무인점포 앞에 있는 중학생들에게 카드를 내밀며 돈을 찾아달라는 걸 목격하고부터다. 병원을 퇴원하거나 이사할 때 매트리스를 걷으면 곳곳에서 돈 봉투가 흘러나왔다.

나이 든 삶에 대해 우리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일찍 주던 늦게 주던 언젠가는 스스로 재산을 관리할 수 없는 시기가 온다.  


형제는 많아도 엄마 부양비를 보낼 사람은 많지 않았다. 손 위 누나인 내가 고정적으로 얼마 보내고 남동생이 거의 도맡았다. 동생은 불만을 드러낸 적이 없다. 차츰 줄어든 집에 대한 책임 때문인지, 맏아들이란 위치 때문인지, 원래 묵묵한 성격 때문인지.

우린 다들 사정을 알기에 똑 같이 나누어 내자든지 하는 의논을 하지 않는다. 이삼십 년 전에는 이런 경우를 대비해 돈을 모으기도 했는데, 각자 형편이 달라지면서 슬그머니 그런 말은 사라져 버렸다. 요양 병원 경비는 다행히 막내가 함께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이럴 때는 형제 많은 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세 명이 힘을 합치면 그럭저럭 굴러갈 것 같다.


어제, 엄마가 요양병원에 들어갔다. 엄마는 성격이 괄괄하다. 쉽게 들어가지 않을 텐데, 동생에게 묻고 싶지만 정신없이 분주할 것 같아 밤에 연락하려고 기다렸다.


병원에 데려다 놓고 잠시 근처 볼 일 보고 온 아들에게 나이 든 엄마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네가 날 버린 줄 알았다” 했다는 친구 말도 떠올랐다.


“어떻게 엄마가 순순히 들어갔니?”

“누나 같으면 그냥 들어가겠어? 며칠 별 수를 다 썼지. 꼬시기도 하고.”

엄마는 얼마 전부터 자주 혼수상태가 됐다. 돌아가시려나 싶어서 영안실을 물색하다 보면 다시 깨어나고. 그러기를 여러 번. 이젠 배변을 가리지 못한다.


부모를 모시던 사람들이 결국 손을 내젓게 되는 게 배변 문제인 것 같다.

오래전 심성 착한 친구가 시어머니를 모시다가 “벽에 똥칠한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실감했다”는 말을 한 적 있다.  


엄마를 보내고 종일 집안 청소를 했다는 남동생은 지금도 빨래하는 중이라 했다. 그러더니 전화기 너머로 나직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살지 모르겠어.”

“엄마? 힘들겠지.”

“아니, 나!”


부모를 모셔보지 않은 사람은 이 마음 절대로 모른다며 동생은 전화를 끊었다.  




“엄마 모시고 있다가 혼자 살게 되면 어떡할래. 옛 말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던데”

지난번에 말했을 때 남동생은 웃었다.  


“아이고, 만세 만세 할 거야.”

그때 남동생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엄마는 의외로 다시 좋아질지 모른다. 한 방에 할머니들이 여덟이나 있다니 적절히 자극을 받을 테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이번 집으로 이사 오기 전 요양병원으로 일찌감치 갔으면 지금보다 치매가 늦게 왔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엄마도 걱정이지만, 나는 남동생에게 더 마음이 쓰인다.




작가의 이전글 모과 향기 풍기던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