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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25. 2020

맥락 따라 책 읽기, '경계에서의 글쓰기'

말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책도 급히 읽고 덮어버리면 후일 '그 책 좋았지'라는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아니,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책을 읽을 때, 옆에 메모 노트를 두거나 핸드폰 메모장을 켜놓는다. 나름 책에서 얻은 좋은 내용을 기억하려는 방편이다.


글을 쓰게 되면서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게 논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쓰던 수필을 쓰던 글에 논리성이 없으면 독자에게 공감을 주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보완할 수 있을까? 그러다 눈에 띈 게 신문의 칼럼이었다. 내가 읽기에 어려우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테니, 이해하기 쉽고 문장이 좋은, 게다가 재미있기까지 한 글들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오민석, 김영민, 김창기, 신이현, 이승재의 글을 꼼꼼하게 읽는다. 교수, 의사, 농부, 영화 비평가.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분들이라 뭐라고 이름 뒤에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통틀어 ‘작가’라 부르련다.

시사와 철학을 포함한 무겁고 진지한 글, 보편적인 삶의 모습을 솔직히 드러낸 글, 유머 넘치는 글. 이들의 글을 짬짬이 필사하려고 마음먹었다. 노트에 적어 놓으니, 나중에 다시 읽게 되었다. 논리성을 배우려는 이 방법은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니다. 그러니 방법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오민석 작가의 칼럼이 『경계에서의 글쓰기』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는 소식을 브런치에서 알게 됐다.

나는 그의 칼럼 ‘폐허 씨, 존재의 영도에 서다’를 기억한다. 이 칼럼은 지금까지 팽팽한 이견으로 대립하고 있는 한 사건으로 나라 전체가 시끄러울 때 신문에 실렸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은유에 가득 찬 글. 그래서 이 글을 아직 기억하는지 모른다.


처음 접하는 ‘클리셰(cliche)' '억견(doxa)' '아포리아(aporia)’ ‘파레시아(paresia)’ 같은 낯선 단어들을 좋아한다. 열심히 푸른 창에 물어본다.


작가가 칼럼을 쓴 기간은 대략 최근 나라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니 제목이 ‘경계에서의 글쓰기’이다. 기존의 가치관이 붕괴되며 다양한 생각들이 범람해 무엇이 진실인지 혼돈스러운 시기에 가정, 사회, 정치, 보편적인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각을 쓴 글이다. 글의 폭이 넓다. 글에서 풍기는 힘찬 기운이 좋다.


그의 글 「악에 대하여」를 살펴보자.


테리 이글턴은 “악이란 이해 너머에 있는 것, 이해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악의 치열성이고 절대성이다. 악인들은 본인들이 악하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는다.
다시 이글턴을 인용하면 “악이란 자기 너머에 있는 것, 가령 대의(大義) 같은 것과 아무런 관련을 갖고 있지 않다.” p139~140


한 사회를 집단 광기로 몰고 가는 여러 가지 시뮬라크르 ㅡ처음 보는 단어군. ‘허상’ ‘복제’ 정도로 간단히 해석하자 ㅡ들이 있다. 근대국가의 형성과 발전의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것들이 ‘민족’, ‘애국’, ‘혁명’, ‘조국’, 이런 것들이다.
이런 기표들은 대부분 국가주의의 기의記意 ㅡ말에 있어서 소리로 표시되는 의미를 이르는 말=시니피에 ㅡ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을 적대시한다.
대신 그것들은 그 안에 참여하는 개인들을 동질성의 확고한 틀로 묶어내며, 그것이 열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정의의 투사’라는 판타지를 갖게 만든다. p141


큰 죄의식 없이 무신경하게 저지르는 잘못. 평범한 이웃이 저지르는 '악'을 우리는 많이 목도하지 않았나.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란 말로 경고했다.




사랑에 대한 그의 글 「사랑하기의 어려움」을 눈여겨보자.


사랑은 능동적인 지배가 아니라, 타자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타자에 대한 ‘환대’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 엎드림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사랑은 궁극적으로 감성이 아니라 의지이고 고통이다. p174


잠깐 손자를 돌볼 때 녀석을 혼낸 이야기를 했을 때  지인은 처음에 이렇게 말했다.


“남자애 둘이면 자기들끼리 잘 노는데 나무랄 게 뭐 있나.”


같이 걸을 때 그녀는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헤어질 무렵 그녀가 내게 불쑥 말했다.


“난, 그때 아이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어요. 남편은 너무 바쁘고 애들은 온전히 내 책임이었는데. 너무 미숙했어요. 아이들이 혼나고 매 맞은 것을 기억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해요.”


문틈으로 삐져나온 옷자락을 잡아당기자 문이 활짝 열렸다.

가라앉은 기억을 되살려 꺼내놓기에 그녀도 용기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아이들은 잊어버렸을 거예요. 잘 자란 걸요.”


후회하는 기억 하나 없는 엄마가 어디 있을까.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인 것을.


사랑은 의지이고 고통이라 한다.

따라 하기 너무 어렵지만, 잊어버리지 않게 자꾸 되새김할 밖에.




문학적 향기가 짙게 풍기는 글「즈음의 시간」. 평화에 관한 소신을 관철한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새들의 노래」.「내가 밥 딜런을 좋아하는 이유」.「샤갈의 눈썰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건 뭘까?

뇌리에 흔적을 남긴 글들을 찾고 보니, '어떠한 가치도 사랑과 평화를 앞설 수 없다'는 말 아닐까.



#『경계에서의 글쓰기』오민석, 행성비(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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