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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26. 2020

조영남의 화투 그림과 뒤샹의 샘

미술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신문에서 대법원이 조영남의 ‘그림 대작’ 사건을 무죄로 확정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나는  문득 뒤샹의 ‘샘’이 떠올랐다.


오래전 퐁피두 뮤지움에 갔을 때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샘(fountain)'을 봤다.




워낙 널리 알려진 작품이어서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조악하게 공장에서 만든 변기에 뒤샹이 'R.MUTT'(변기 제조업체 이름인 'Mott Works'를 살짝 바꾼 것)란 가명으로 서명을 하고 공모전에 출품한 것일 뿐. 게다가 이게 원본도 아니라 했다. 원 작품은 흑평에 시달려 버려졌다.


그때 느낀 생각은 '저런 물건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니… ' 였다.


'이러다 보면 중구난방, 아전인수 격인 작품들이 현대 미술이라고 등장하겠군.'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최근엔 벽에 바나나를 붙여놓은 작품도 있지 않았나. 작품 가격이 일억 원이 넘었던 기억이 난다. 당혹스럽게 며칠 후 관람자가 익은 바나나를 먹어버렸다는 소문이었고, 작가는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다시 새 바나나를 붙여놓았다지만.


그러면 발상과 의도, 품은 의미를 중요시하는 게 현대 미술의 특징일까? 미술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퐁피두 뮤지움에서 뒤샹의 샘을 본 지 5년이 지났을 때, 서울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뒤샹 전’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보고 싶었다.


이전에 ‘샘’을 봤을 때 별 감흥이 없었는데. 나는 왜 뒤샹의 작품을 다시 보고 싶었을까?



서울 국립 현대미술관 뒤샹 전 포스터


그동안 뒤샹의 작품들을 관심 있게 봐 왔던 게 뒤샹을 다른 시각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뒤샹을 알아야 현대미술을 이해할 수 있다지 않은가.


뒤샹은 초기에 모든 화가의 화풍을 시험적으로 그려본 것 같다. 상징주의, 후기 인상주의, 입체주의, 야수주의.

전시회에는 세잔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아버지를 그린 작품은 세잔느의 아버지 그림과 유사해 보였다. 피카소의 청색시대 풍의 그림도 있었다. 모든 창조의 시작은 모방이라는 말이 있다. 피카소도 벨레스케스의 그림을, 살바도르 달리도 피카소의 그림을 흉내 내지 않았던가.


뒤샹은 ‘샘’을 출품 함으로 세상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작품을 계기로  이후 '미'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달라진다. ‘레디메이드’란 ‘기성품’을 의미하며, 물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길이 암시되어 있다. 뒤샹의 '샘'을 후일  미술사가들은 현대미술의 분기점으로 평가한다.


뒤샹이 특이한 점은 16세에 프랑스 전국 수학 경시대회에 우승했고, 체스 챔피언 프랑스 대표였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화가의 뜨거운 감성과 차갑고 냉정한 이과적 지성이 함께 있었던 것 같다.

뒤샹의 작품은 모두 보존되어 있다. 복제품까지. 작품들로 만든 미니어처 같은 가방을 뒤샹이 아니라면 누가 생각해 낼 수 있을까? 원본이 자그마치 300개, 복사본이 400개라나. 뒤샹은 자기의 작품으로 프로포잘을 만든 거 같았다. 그는 작품을 만들기까지의 모든 메모와 그 메모의 복사품까지 만들어 보관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현재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뒤샹전에서 그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큰 유리’(1915~1923)를 만났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벽면의 유리 한 장이 작품이다.

거기에 뒤샹은 여인과 아홉 명의 구혼자 그들이 내뿜은 성적인 호르몬, 돌고 있는 초콜릿 공장의 이미지까지 넣어 완성했다. 내가 이해하기엔 어려웠다.


내면의 여성성을 여성 분장으로 드러내 보이는 사진도 있었다. 사진으로 보는 그의 정체성은 혼돈스러워 보였다. 자유로운 영혼이어서 일까? 그는 다양한 정체성을 갖기를 원했다. ‘에로스 세 라 비(Eros c'est la vie)', 가명의 뜻은 '사랑, 그것이 인생이다’.



뒤샹의 초기 작품을 보지 못했더라면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같은 작품을 이해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이 작품은 사진과 같이 인체의 세밀한 움직임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도 많은 비난을 받았다. 작품 수정 요청을 받기도 했다. 예술가의 고집스러움은 자기 작품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겠다.

결국 출품을 취소했지만 이듬해 출품했을 때는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얻는다.


어쩌면 뒤샹은 관객이 자기를 이해하고 따라오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큰 유리’ 작품이 전시 이동 중 유리에 세밀한 금이 생겼을 때조차 뒤샹은 그 부분도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조영남 대작 사건의 판결에 대해 『미학 오디세이』의 저자 진중권은 “103년 만에 현대 미술의 개념에 눈을 뜨게 만든 판결”이라고 말했다. 103년 전인 1917년은 뒤샹이 ‘샘’을 공모전에 출품한 해다.


대법원 판결에 대한 미술계의 반응은 다양했다.

보조자의 도움으로 그린 작품을 자신의 작품으로 판매한 게 사기죄가 성립되는지가 사법 처리의 관건이었는데 모든 작품을 자기의 힘으로 완성했다는 대가의 예를 드는 이도 있고,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미켈란젤로가 혼자 그렸겠냐고 질문을 던지는 이도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미술작품의 가치 평가에 사법적 판단은 자제하는 게 옳다는 판결에 동의하는 분위기이다.


대작의혹 사건의 그림 가운데 하나로 검찰이 제시한 '병마용갱' [이미지출처=연합뉴스]

 

혹시 본인의 다년간의 노력에 비해 타인의 성취가 수월해 보였던 건 아닐까? 우리 문화계에 은연중 침투해 있는 도제제도에 대한 인식이 몸에 배어 불편했던 건 아닐까?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을 보고 당황했던 게 언제 적 일인데, 아마추어 미술애호가인 나의 생각이다.


“붓을 갖고 오래 놀면 패가망신한다더니… "


텔레비전 뉴스에서 흘러나온 조영남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힘든 상황에서도 그는 유머를 빼앗기지 않았다. 조영남이 다시 붓을 들 수 있을까?


내면에 폭풍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간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걸 토해내는 법인데.




#뒤샹

#조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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