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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28. 2020

오랜만에 읽은 장편 소설

서사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는?



얼마 전 친구에게 빌려준 책을 돌려받고 보니  낯선 책이 몇 권 얹혀 있었다.  

 

『사라진 딸』(제인 셔밀트 지음, 김성훈 옮김, 북플라자),『둠즈데이북』(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아작), 『굿 라이어』(니컬러스 설 지음, 이윤진 옮김, 열린책들). 범죄 추리, SF, 스릴러 물이다.


저녁이면 줄곧 자기 방에서 책을 읽는다는 친구 남편 덕분에 오랜만에 영미 장편소설을 읽게 되었다.


최근에는 수필과 단편 소설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기에 이런 류의 장편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 독서의 공백기라 할 나의 지친 삼사십 대를 채워준 건 이런 책들이었다. 그 무렵에는 “무슨 재미로 수필을 읽지?” “단편소설은 읽다 만 것 같아 아쉬워?” 하고 다녔다.


코로나 19로 외출을 삼가다 보니 산책하고 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일, 책 읽고 글 끄적거리는 일이 대부분인 생활이 되어버렸다. 친구가 빌려준 책들을 나란히 늘어놓고 읽다 보니 단편 소설을 쓰려고 허우적거릴 때 생각이 나서 작가가 서사를 풀어가는 과정, 등장 인물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요즈음은 작가가 전문 분야의 지식을 활용해 쓴 소설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띈다. 그나마 전직이 교사인 『둠즈데이북』의 저자 코니 윌리스가 평범해 보일 뿐. 『사라진 딸』의 저자 제인 셔밀트는 책의 주인공과 같이 직업이 의사다. 『굿 라이어』의 저자 니컬러스 설은 전직이 정보부 공무원이었다니 글을 구상하기에 다른 이들보다  한 발 용이하지 않았을까. 이건 소설 쓰기가 전문 작가의 영역이면서, 긍정적인 면으로 영역이 넓게 확대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랜만에 읽느라 더뎠는데, 차츰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작년 봄 처음으로 단편 소설을 쓸 때, 그동안 써놓은 수필 중 한 가지 주제로 쓴 것들을 모아 얼추 소설의 형태로 만들어 본 적이 있다.


그때 가장 고민스러웠던 건 ‘사건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와 ‘주동인물인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의 대척점에 설 반동인물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를 상상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사라진 딸』에서는 딸이 사라진 무렵과 일 년 후인 현재를 교차해서 서사를 진행한다. 사건은 딸이 사라지기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지만, 주인공은 일 년 후에야 그걸 서서히 깨닫는 식이다. 플롯은 딸이 사라지기 하루 전부터 시작해서 17일 전으로 거슬러 갔다가 점점 사건이 일어난 날로 다가오고 사이사이 현재가 끼어든다.


『둠즈데이 북』은 한 달 안 되는 기간이 배경이지만, 현재와 과거, 2054년과 1348년이 교차하며 서사가 진행된다. 소설 속에서 현재는 바이러스 감염으로, 과거는 페스트로 사람들이 죽어간다. 작가는 이 소설을 1992년에 발표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기록한 메모를 보고 “혹시 외계인 아닐까?” 의문을 던지는 이가 있듯, 미리 본 듯 미래를 추측하는 작가들을 보면 나도 비슷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작가는 28년 전 이미 현재의 상황을 떠올렸다.


『굿 라이어』의 서사는 현재로 시작하는데 뚜렷이 몇 년인지를 명시하지 않는다. 읽다가 혼돈스러웠던 건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는데 현재를 기준으로 좌표가 조금씩 과거로 옮겨가서였다. 책의 ‘차례’를 보고서야 나는 소설의 전개를 이해했다.


주인공은 1998년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해 25년 전, 35년 전, 41년 전, 52년 전, 60년 전으로 되돌아가 마침내 사건이 시작되는 나이인 14세가 된다. 서사는 계속 과거와 현재를 교차한다


남자 주인공의 나이는 70대 후반, 여주인공의 나이는 70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노인이 주인공인 스릴러물이라니….


 영미 장편 소설 세 권을 연이어 읽으며 나는 ‘이런 식의 소설 전개가 하나의 흐름인가 보다’  생각이 들었다.




『굿 라이어』의 ‘로이’를 볼 때는 당황스러웠다. 예전 소설의 주인공은 대부분 선한 인물이었기에. 처음부터 그는 낱낱이 자기의 치졸한 본성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정확히 계산된 전문 사기꾼.


 ‘악’으로 상징되는 로이는 소설의 주동인물인 프로타고니스트이다. 그에 반해 ‘선’을 상징하는 인물인 베티는 안타고니스트다. 소설의 서사는 점차 로이가 단순한 사기꾼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변화할 수 없는 걸까? 나의 기대에 불구하고. 서사의 흐름은 로이를 점점 더 어둠의 중심으로 걸어가게 한다.  


끊임없이 회의하고 우왕좌왕하는 게 인간이라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 성격의 일관성을 ‘톤’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2000년도 더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인용해 시나리오 쓰기 교본으로 만든 책『스토리텔링의 비밀』(마이클 티어 노지음, 김윤철 옮김, 아우라)에 이런 글이 있다.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하나로 통일된 정서의 성격 또는 이야기 속 행동의 톤은 정말로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톤의 일치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톤의 일치는 극적 행동을 수행하는 ‘행위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고 그 행위자의 ‘성격과 사상의 차이로 구별할 수 있는 특성이 관객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며 관객들의 지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p166『스토리텔링의 비밀』


「당신은 절대 <사랑>이라는 단어를 안 쓰네요. 그렇죠?」
「그 단어를 쓰는 사람이 있긴 한가요? 실제 삶에서요? 특히나 우리 세대에서요? 어쨌든 남자들은 안 쓰잖아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단연코 쓰지 않는 것 같아요. 과거에 대해 말할 때도 그렇고 우리에 대해 말할 때도 그렇고요.」
「내가 그 단어를 썼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당신이 더 기뻐할까요? 당신이 원한다면야 시도하고도 남죠.」 p285 『굿 라이어』




『그레이엄 그린』(서창렬 옮김, 현대문학) 단편 모음집에 실린「설명의 암시(The hint of an Explanation」에 주인공인 소년과 ‘그것’이라 불리는 어떤 대상이 나온다.


“그것?”
 “사탄이라는 말은 너무 인격화된 표현이어서 그 대신 쓴 겁니다."


‘그것’은 곧 주인공의 회상 안에서 ‘블래커(Backer)’라는 이름의 중년 신사로 등장한다.

'Backer'? 검게 하는 사람? 악으로 물들이는 사람?

그레이엄 그린은 교묘하게 안타고니스트로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에 그 특질을 넣어놓았다.


「아니, 우리는 이 건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질 거야. 씁쓸한 꼴을 볼 때까지. 이봐, 빈센트, 이게 내 삶이야. 이리저리 빠져나가고 계략을 짜는 것이. 이게 나야. 그리고 이게 너고. 그건 우리 둘 다 알고 있어. 빈센트, 나는 너를 반응하게 만드는 것이 뭔지 알아. 아니, 때가 되면 나는 어떤 탐욕스러운 대상이 멍청한 짓을 하도록 설득하면서 현장에서 죽을 거야. 어쩌면 그것이 이번 대상일 수도 있지. 다음 대상일 수도 있고. 자, 이제 우리 할 일을 해도 될까?」 p337 『굿 라이어』


흰색과 검은 색, 선악의 대비만큼 확실하게 독자를 끌어당기는 수단이 있을까?


『둠즈데이북』에서 던워디 교수와 키브린, 로슈 신부가 흰색이라면 길크리스트와 이메인 부인은 검은 색이다.『굿 라이어』에선 주인공인 로이가 검은색이고, 베티가 흰색이다.

주인공을 제외한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흰색에 가까운 회색(앤드루)이거나 검정에 가까운 진한 회색(빈센트), 그 사이 어디에 위치한다. 대부분 다른 소설의 등장인물들도 그렇다. 착하거나, 덜 착하거나, 악하거나 덜 악하거나.




예전과 달리 우리 세대의 독자는 선과 악이 주동인물과 반동 인물이라는 전형적인 구도를, 현재와 과거의 단순한 반복으로 이어지는 서사 전개를  클리셰 하게 느끼는 것 같다.

『사라진 딸』에선 반동인물이 누구인지 추측만 자아낼 뿐 책 후반에 이르기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을 때, 반동인물을 검은색이라 규정할 수 조차 없다.『둠즈데이 북』에선 미래와 과거가 수시로 교차하며 서사가 전개된다. 핍진성을 이유로 과거의 선한 인물들을 살려두지도 않는다. 프로

타고니스트 프로타고니스트

독자가 예측할 수 있는 소설이란 얼마나 진부한가. 작가는 다양한 방법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증폭시켜서 끝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사라진 딸』(제인 셔밀트 지음, 김성훈 옮김, 북플라자)

#『둠즈데이 북』(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아작)

#『굿 라이어』(니컬러스 설 지음, 이윤진 옮김, 열린책들)

#『그레이엄 그린』(서창렬 옮김, 핸대문학)

#『스토리텔링의 비밀』(마이클 티어 노지음, 김윤철 옮김, 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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